[책&생각] 암울한 시대, 서경식이 호명하는 ‘선한 아메리카’
개인사·예술작품·세계에 대한 통찰
‘자기중심주의’ ‘불관용’ 판치는 시대
망가지는 미국 직시…‘선한 미국’ 붙들어
나의 미국 인문 기행
서경식 지음, 최재혁 옮김 l 반비 l 1만8000원
“서 선생님과 만나 이야기를 할 때마다 그가 말하는 내용이 동서고금을 종횡무진하며 종축(시간축)과 횡축(사색의 너비)의 사정거리가 너무 커서, 아무리 쫓아가려 해도 붙잡을 수 없는 그런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런 점이 너무 좋았습니다.”
‘디아스포라’ 지식인 서경식(1951~2023)의 책을 30년 동안 만들어온 일본 고분켄 출판사의 편집자 마나베 가오루는 서 작가에 대해 이렇게 회상한다. 재일조선인 2세로 태어난 서경식은 1970년대 ‘재일조선인 유학생 간첩단 사건’이라는 조작 사건으로 두 형(서승, 서준식)이 억울하게 구속되자 형들의 석방과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활동했다. 그는 또 지난 30년 동안 ‘나의 서양미술 순례’ ‘디아스포라 기행’ ‘시의 힘’ 등 수많은 책을 써 한일 독자에게 깊은 울림을 주었다. 그랬던 그가 지난해 12월18일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고, 그의 유작인 ‘나의 미국 인문 기행’이 최근 출간됐다. 마나베 가오루처럼 그의 드넓은 사유의 지평과 기품있는 글을 좋아했던 독자라면 그의 마지막 책을 상실감과 함께 집어 들 것이고, 그를 잘 모르는 독자라면 다양한 예술과 인문 정신이 만나는 이 책의 독특한 매력에 끌리고 말 것이다.
흔히 예술 작품에 대한 생각을 풀어가는 에세이는 작품에 대한 작가의 감상이나 예술가의 삶에 대해 소개하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그러나 이 책은 독특하게도 세 단위의 시간을 왔다 갔다 하면서 이야기를 풀어가는데, 작가 자신의 개인사와 미국 및 세계정세에 대한 통찰, 예술에 대한 감상이 한데 어우러져 색다른 ‘글맛’을 느끼게 해준다.
책에서 주로 다루는 첫 번째 시간대는 1985~86년 즈음이다. 두 형의 석방과 지원 활동을 위해 서 작가가 미국 인권단체와 국무부를 방문했던 시기다. 독재 정권의 탄압으로 형들이 투옥됐고 그들을 위해 미국에 왔지만, 그는 짬날 때마다 미술관을 찾았다고 한다. “어떤 악몽의 시대에도 관용, 연대, 공감을 추구하려는 인문 정신이 살아 있음을 가르쳐주는 예술”이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졌던 그에게 ‘산소 호흡기’이지 않았을까. 와세다대학 문학부에서 프랑스 문학을 공부한 그는 미술사나 미학을 전공한 사람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예술에 조예가 깊다. 당시 그는 조지 벨로스(1882~1925)의 ‘이 클럽의 두 회원’이라는 작품을 넋을 놓고 봤다고 전한다. 링 위에서 서로를 죽이려는 듯 싸우는 두 남성. “어둠 속에서 폭력과 낭자한 유혈에 흠씬 취해 흥분한” 관객들을 보며 작가는 정권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죽였던 당시 한국과 필리핀의 무자비한 정권 그리고 그런 폭력을 구경꾼처럼 보는 사람들을 연상한다.
두 번째 시간대는 2016년이다. 친구이자 코스타리카대학 시(C) 교수의 강연 의뢰로 작가가 미국을 방문했던 시기인데, 당시 도널드 트럼프가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로 뽑혔다. 작가는 트럼프의 노골적인 인종차별과 전쟁 도발에 인류가 파멸로 가는 중이라고 감각하는데, 이때 컬럼비아대학 캠퍼스 내 ‘에드워드 사이드 기념실’로 견학을 간다. ‘오리엔탈리즘’ ‘문화와 제국주의’를 쓴 에드워드 사이드는 팔레스타인계 아랍인이면서 아버지 세대부터 미국인으로 살아온 ‘디아스포라’이다. 이방인, 경계인의 삶을 산 그는 학자로서 누릴 수 있는 편안하고 안락한 삶 대신 정의에 대해 묻는 지식인이었다.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던 그는 서 작가와 비슷한 면이 많아 보이는데, 서 작가도 그를 이정표 삼았다고 말한다. 작가는 사이드의 인터뷰와 책, 삶 등을 두루 다루며 “승산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진실을 말하겠다는 의지”를 벼린다.
마지막 시점은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전 세계가 공포에 빠져들었던 2020년이다. 작가는 코로나19로 인해 전 세계 사망자 수가 9만명을 넘어서자 “중세 유럽을 휩쓸었던 페스트의 재앙이 다시 찾아왔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한다. 타자의 고난에 대한 상상력을 강조했던 그는 개발도상국에서 더 가혹한 일이 일어날 것이라며 걱정한다. 그러면서 역병의 참상을 작품화한 카라바조(1571~1610)나 미켈란젤로, 보카치오 등 다양한 예술가들을 떠올린다.
당시 시점에서 서 작가가 가장 우려하는 ‘대재앙’은 “자기중심주의와 불관용의 정신이 만연하고 파시즘이 대두하는 시대”였다. 트럼프 집권 시기를 거쳐 그가 이 책의 맺음말을 썼던 지난해 12월,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그가 말한 ‘대재앙’은 현실화됐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이스라엘의 가자 지구 침공까지 지구 곳곳에서 살육이 벌어지고 있고, 이민자 배척을 부르짖는 트럼프가 다시 공화당의 유력 대권 후보가 되고 있는 상황이다. 인권의 가치, 인문주의 정신을 강조해왔던 서 작가는 “우크라이나도 미얀마도 모두 급속하게 ‘진부한 일’이 되고 있다”며 절망한다.
저자는 책 곳곳에서 이런 암흑 같은 시대에 ‘글을 쓴다는 것’의 의미를 묻곤 한다. 그는 벤 샨이나 에드워드 사이드처럼 자신이 절망에 빠졌을 때 힘을 불어넣어 주었던 ‘선한 아메리카’를 호명하고 이에 대한 글을 씀으로써, 미국이라는 국가가 ‘선한 아메리카’의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파멸을 향해 갈 운명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우리는 계속 앞으로 나아가고 싶다”고 말한 에드워드 사이드처럼 그 역시 계속 쓰고 또 쓰면서 인권의 가치를 말하고 인문주의 정신을 삶 속에서 실천한 것이다. ‘나쁜 아메리카’의 추한 민낯을 직시하면서도 ‘선한 아메리카’의 기억을 꺼내 일반 독자들의 눈높이로 소통하는 그의 글은 독자들이 좁은 공간과 짧은 시간을 벗어나 너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도록 안내한다.
양선아 기자 anmad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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