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생각] “좋은 걸 주기 전 끝낼 수 없다는 단편”의 리얼리티

임인택 기자 2024. 1. 26.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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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등단 소설가 박지영
‘계산’에 실패하는 노동자들
입담·상징의 세밀한 실재성으로
‘계산 밖 계산’의 미덕 역설
첫 소설집과도 결부되어 확장
연작소설 ‘테레사의 오리무중’을 펴낸 소설가 박지영. 그는 후기에서 “소설 속 인물들에게 좋은 것을 건네주기 전에는 단편을 쉽게 끝낼 수가 없다”고 썼다. 자음과모음 제공

테레사의 오리무중
박지영 지음 l 자음과모음 l 1만4000원

소설가 박지영(50)의 작품엔 이런저런 계산 내지 거래가 적잖이 전개된다. 인물들은 군색해지고 피로해진다. 비용 대비 쓸모를 재고 견주고 가르고…. 그런데 막상 재는 자들이 아니라 재어지고 나뉘는 자들이라면, 진실은 조금 달라진다.

“장례 토털 서비스 업체의 상품 아홉 개 중 아래에서 세번째. 베이직과 스탠더드 다음으로 저렴한 상품이지만 이름이 클래식이라 그렇게 저렴한 느낌은 들지 않았다. …문제는 장례업체의 입장에서는 그래도 싼 상품이 현수에게는 그래도 비싼 상품이라는 데 있었다.” 요행히 업체에서 오픈 기념 이벤트 중이다. 행사 기간 내 이용자는 등급 업그레이드가 된다. “남은 행사 기간은 두 달. 그러니 두 달 안에 죽기만 하면 스탠더드 가격으로 클래식한 죽음을 누릴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단편 ‘장례 세일’)

평균 5~7년짜리 전기밥솥 수명을 꽉 채운 7년식 10인용 전기밥솥―하지만 쓸 만하다―과 치매 진단받은 지 7년 된 강만석―쓸데없다―을 집에 둔 아들 선동은 고민이 많다. “그리하여 강선동은 염병 비용을 고려한, 어디까지나 객관적인 부양료 산정에 도움이 될 만한 자료를 가족 단톡방에 올렸다. …개인 간병의 경우 하루 12만원이 기본. 치매나 중증 환자는 하루 1만원의 간병비 추가. 식대는 별도로 하루에 5000원 추가되거나 햇반 세 개 제공. 햇반은 300그램 기준.” 네 가지 케어 등급 비용을 선동은 올린다. “기본 케어 170만원, 세심한 케어 190만원, 다정플러스 케어 220만원, 하나뿐인 가족 케어 240만원.”(단편 ‘쿠쿠, 나의 반려밥솥에게’)

이번 출간된 단편집과 등단 13년 만의 첫 단편집(‘이달의 이웃비’, 2023)에 각기 수록된 작품들이다. ‘삶’ 앞에 자못 부박해 보이는 계산들과 고심초사의 선택이 생계인 사람들이 박지영의 사람들이다. 이때 자본주의 사회가 청구하는 내역서들만 한 리얼리티가, 디테일이 있을까. 박지영이 혹여 에스에프(SF)를 쓰더라도, 그건 리얼리티일 것이다.

신간 ‘테레사의 오리무중’은 미발표작 포함 단편 셋으로 구성된 연작소설이다. 빙판 위 이야기처럼 독자는 미끄러지듯 피식대며 읽어 나가지만, 빙판 아래 숨 막히는 삶의 진실이 결빙되어 있다. 언뜻번뜻 그것들은 비치고, 돌 박힌 얼음장처럼 삐져나와 있다.

‘장례 세일’을 마저 보자. 패배 의식에 길들여진 현수에게 바람이 하나 있다. 병원 경비원으로 일하는 동안 아버지 독고씨의 장례를 치르는 거다. 계약직에겐 장례식장 이용료가 30% 할인된다. 희곡으로 등단했지만 현수의 작품은 단 한번 흥행한 적 없고, 코로나 여파로 그나마 연극판을 떠났다. 독고씨는 평생 세일즈맨으로 살다 막판 총판 사기를 당해 파산 신고―그때 현수 글은 절절하기 이를 데 없어 법원 상대 세일즈에 성공한다, 처음으로―했고 요양병원에 누워 있다. 남은 계약 기간 두 달, 타이밍을 맞출 법하다. 현수는 독고씨가 인연 맺은 이들에게 감사 편지를 보낸다. 사실이야 어떻든 아버지에게 베푼 선행을 저마다 추억하게 하고, 기꺼이 부의 애도하도록 하려는 계산이다. 하지만 독고씨는, 아들의 계약직과 달리, 두 달을 넘긴다. 하물며 ‘백수’ 현수가 새로 물류센터 일자리 면접을 잡은 날에야 임종. 장례를 준비하던 현수는 일방으로 면접 약속을 깼다며 물류센터 하급관리자 주경과 심하게 다퉈야 했다. ‘가성비’를 재고 재며 정작 애도할 수는 없는 제 신세를 탓하는데, 뜻밖으로 주경이 문상 온다.

‘장례 세일’은 ‘쿠쿠, 나의 반려밥솥에게’의 연장으로 읽힌다. 주인공의 직업 성품 계산식도 닮았다. (마침 2024년, 23년 현대문학상 우수상을 각각 받았다.) 치매 아버지의 일상을 유튜브로 세일즈해보려는 선동, 아버지에 대한 연민을 편지로 세일즈해보려는 현수. 살아 돌봄 비용을 계산하다 죽어 장례 비용을 계산하는 이들의 말하자면 ‘가성비 윤리’는 이들의 인격이라기보다 밑천이다. 밑천이 윤리라서 현수와 선동의 선한 마음조차 곧 드러나는 밑천으로 군색해지기 십상이다.

다만 여기서 이들 궁핍한 삶을 끝내 놓지 않고, 비관만 시키지 않는다는 데 박지영의 미덕이 있다. 그는 그것까지 리얼리티라고 여러 버전을 궁리하며 말하려는 듯하다.

표제작은 여성 테레사의 뒤늦은 자아성찰 내지 자아분열을 ‘사건’ 삼는다. 입담, 상상, 은유가 거침없다. 알고 보니 테레사의 자아, 즉 “그동안 먹고사느라 바빠서, 피곤해서, 남는 에너지가 없어서, …묵혀두었던 그 창조적 자아, 자아실현이라고 말할 때의 그 빛나는 영광의 정수”라는 게 형체를 지니고 있다. 테레사는 이 자아를 ‘성 테레사 자매님’이라 칭한다. 한데 막상 보니 이 자아가 진상. 자아를 데리고 다닐 만한 일터가 아니라 집에 남겼더니, 자아실현은커녕 종일 늦잠에 점심 라면, 다시 누워 전날 테레사가 본 유튜브 알고리즘으로 뜨는 쇼츠 영상 보고 웃느라 하루를 소진한다. 게다가 자신의 관리자인 주경에게 돈까지 빌려 도망간다. 자아를 찾으려는 과정에 새삼 확인하게 되는 건 일찌감치 자아를 훼손시켜 온 세계다. 여자아이, 여성, 노동자로 대응할 새도 없이 당해온 성폭력, 언어폭력, 차별의 실체, 바로 빙판 아래 결빙되어 있던 과거.

이것이 작가가 의도한 최종의 메시지일까. 아니다, 주인공들은 여전히 빙판 위에 있기 때문이다. 빙판을 지치며, 자아를 찾아 오리무중 기꺼이 더 미끄러져 가는 테레사를, 독자를 작가는 만나고 싶어하는 것 같다. 발표된 적 없는 작품 ‘올드 레이디 버드’ 역시, 관계 ‘계산’에 실패해 붕괴되어도 좋을 여성 영우가―마치 다른 소설처럼―자아를 찾아가고 안전을 스스로 구축해가는 2막의 여정을 내딛는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작가는 후기에서 “소설 속 인물들에게 무언가 (내가 줄 수 있는 기간 한정 다정과 같은) 좋은 것을 건네주기 전에는 단편을 쉽게 끝낼 수가 없다. 그러다 보니 분량은 길어지고, …동그랑땡 같은 것을 자꾸 빚어 먹이려고 아등바등하는 것”이라 말한다. 작가는 25일 한겨레에 “(기존 문학에선) 젊은 세대의 비정규직 문제나 그들이 어머니 세대를 지켜보는 관점이 대부분이다. 그와 달리 단기계약직을 선택받아야 하는 입장, 직접 겪어온 당사자로서만 배우고 쓸 수 있는 이야기들이 있어 그걸 통해 다른 입장의 인물들에 대한 (타인들의) 상상과 이해의 폭을 넓히고 싶다”고 말한다. 두 말을 이으면, 계산할 수밖에 없고 필시 계산에 실패하는 궁벽한 삶들을 ‘계산되지 않는 계산’, 하여 ‘쓸모 밖의 계산’으로 위로하려는 마음이겠다. “단편을 단편답게” “긴 꼬리를 좀 잘라내야” 하는데 어지간히 되질 않고, “어떻게든 조금은 나은 것, 선한 것, 좋은 것을 주고 끝내고 싶은 마음….”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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