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생각] 전위란 스타일 아닌, 도발할 용기와 욕먹을 각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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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상에서 흔적으로'는 농촌에서 봄마다 해충을 없애고자 논둑을 태우던 풍습에 착안한 작품이다.
한 변이 22미터가량의 삼각형 7개를 연이어 구획한 다음 역삼각형 3개를 제한 나머지 4개를 불에 태워 꺼멓게 그슬림으로써 불에 타지 않은 부분들과 대비되어 기하학적 조형미를 발산하도록 했다.
현장을 취재한 기자는 김구림에게 전위예술이란 어떤 것인가, 생활은 어떻게 하는가 같은 질문에 이어 '혹시 병원에 가서 정신감정을 받아 본 적이 있는가?'란 질문으로 속내를 내비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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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착 인터뷰 통해 작품세계 설명
몰이해·외면 딛고 자기 세계 구축
노년에도 ‘싸움닭’ 면모는 여전
김구림, 끝장과 앞장의 예술
김종목 지음 l 연립서가 l 4만5000원
“강둑에 불 지르고 ‘이것이 예술이다’’’. 1970년 4월22일 치 주간경향 기사 제목이다. 그달 11일 서울 뚝섬 근처 살곶이다리 옆 강둑에서 펼쳐진 한국 최초의 대지예술 ‘현상에서 흔적으로’를 다룬 기사였다. 이 작품을 선보인 이는 한국 아방가르드 미술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김구림(88). ‘김구림, 끝장과 앞장의 예술’은 사건과 논란으로 점철된 그의 미술 인생을 한눈에 보여주는 안내서다. 경향신문에서 미술 담당 기자를 역임한 김종목이 주인공과의 밀착 인터뷰를 바탕으로 썼다.
‘현상에서 흔적으로’는 농촌에서 봄마다 해충을 없애고자 논둑을 태우던 풍습에 착안한 작품이다. 한 변이 22미터가량의 삼각형 7개를 연이어 구획한 다음 역삼각형 3개를 제한 나머지 4개를 불에 태워 꺼멓게 그슬림으로써 불에 타지 않은 부분들과 대비되어 기하학적 조형미를 발산하도록 했다. 현장을 취재한 기자는 김구림에게 전위예술이란 어떤 것인가, 생활은 어떻게 하는가 같은 질문에 이어 ‘혹시 병원에 가서 정신감정을 받아 본 적이 있는가?’란 질문으로 속내를 내비친다. 기성 화단과 언론의 외면 속에 당시 김구림의 작업을 가십성 기사로나마 취급해 준 것은 주간경향과 선데이서울 같은 흥미 위주 대중 잡지들뿐이었다.
그 무렵 김구림의 작업을 보면 기자의 그런 반응을 탓하기 어렵다는 생각도 든다. 그는 서울 문리대 정문 앞에서 학생들에게 찢어진 콘돔과 가루 위장약, 수수께끼 같은 메모를 나눠 주는가 하면 육교에 오색풍선 100여개를 내걸기도 했고, 동료 예술인들과 함께 태극기와 백기 그리고 꽃판을 들고 행진하다가 즉결 재판소에 넘겨지기까지 했다. 김구림이 이런 일련의 행위예술을 펼친 1970년은 와우아파트가 무너지고 김지하가 ‘오적’을 발표했으며 전태일이 근로기준법 준수를 외치며 분신한 바로 그해였다. 그런 맥락에서 당시 그의 행위예술은 80년대 민중미술과 다르지 않게 억압적인 체제를 향한 항의이자 비명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김구림은 한국 최초의 대지미술을 선보였을 뿐만 아니라 한국 최초의 그라피티와 네온 미술을 시도한 작가였다. 그는 ‘복제되지 않는 판화’ 개념을 개척했고, 비디오아트와 설치미술은 물론 음악과 연극, 영화 등으로도 활동 범위를 넓혔다. 일상의 소품들과 핵전쟁 같은 무거운 주제, 자연과 동양적 음양사상 등 김구림 미술의 소재와 주제는 거의 무한정해 보인다. 늘 변화하고 나아가는 것이 그가 생각하는 예술이기 때문이다. 상업성에 대한 거부감 역시 김구림 예술의 알짬을 이룬다.
이렇다 할 미술 교육을 받지 않은 그의 평지돌출 식 작업에 국내 화단이 ‘왕따’로 일관한 것과 달리 외국에서는 일찍부터 호평이 이어졌다. 그는 1970년대 초에 일본으로 건너가 공모전과 개인전을 치렀으며, 1984년부터 2000년까지는 미국에 머무르며 백남준과 함께한 합동전과 개인전 등을 여러 차례 열었다. 지난해 8월부터 새달 12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리고 있는 대규모 개인전은 그에 대한 평가가 어느 정도 자리 잡았음을 보여준다. 그렇지만 그는 이 전시를 준비하면서도 주최 측과의 이견과 불화를 거침없이 드러내는 등 여전한 ‘싸움닭’으로서의 면모를 과시했다. “전위라는 건 스타일 문제가 아니라 도발을 감행하는 용기와 욕먹을 각오를 감당하는 배짱”이라는 지은이의 판단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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