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이나 법과 치팅 컬처 [뉴스룸에서]

김기중 2024. 1. 26.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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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빠가 거짓말을 한 것을 다 봤다. 엄마가 아빠처럼 거짓말한 것도 다 봤다. 그래서 나도 거짓말을 했다. 우리 모두 코가 길어졌다."

KLPGA는 속임수를 쓰더라도 얼마 지나지 않아 경감이 될 수 있다는 '윤이나 법' 신호를 선수들에게 직접 보낸 것이나 다름없다.

'윤이나 법'을 직접 경험한 선수들은 손해를 보고 있다고 느낄 것이고, 그들 역시 한 타에 희비가 갈리는 순간이라면 속임수를 택할 수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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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이나가 2022년 9월 20일 서울 강남구 한국여자프로골프협회(KLPGA) 사무국에서 열린 상벌분과위원회에 출석하며 사과하고 있다. 연합뉴스

“나는 아빠가 거짓말을 한 것을 다 봤다. 엄마가 아빠처럼 거짓말한 것도 다 봤다. 그래서 나도 거짓말을 했다. 우리 모두 코가 길어졌다.”

아들이 얼마 전 유치원에서 피노키오 동화를 듣고 쓴 ‘거짓말’이라는 제목의 동시다. 한동안 아들은 대화를 나누다가 내 눈치를 보면서 자신의 코를 슬쩍 만졌다. 자신이 했던 말의 뒤끝이 영 개운치 않았었나 보다.

심판이 없는 스포츠 골프에서는 거짓말 또는 속임수를 의미하는 ‘치팅’(Cheating)을 최악의 불법행위로 간주한다. 그래서 골프 규칙 가장 첫머리부터 정직을 강조하고 있다. 제1장에 ‘플레이어는 골프 게임의 정신에 따라 규칙을 따르고 모든 페널티를 적용하며 어떠한 상황에서도 정직하게 플레이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골프 선수가 지켜야 할 가장 중요한 원칙은 곧 정직이라는 의미다.

‘장타 여왕’ 윤이나가 이르면 3월 필드로 돌아온다. 윤이나는 2022년 6월 다른 사람의 공을 치는 ‘오구 플레이’를 하고도 이 사실을 한 달 동안이나 감췄다가 3년 출전 정지 징계를 받았다. 한국 골프 역사에 남을 치팅 사건이었지만 고작 3년짜리 징계를 받을 때부터 ‘솜방망이 처벌’ 논란이 끊이지 않았는데, 최근 한국여자프로골프협회(KLPGA) 이사회는 이마저도 1년 6개월로 줄여줬다.

선수 출신이 대부분인 KLPGA 이사들은 현역 시절이었다면 과연 속임수를 쓴 선수의 빠른 복귀를 환대해줬을까. ‘저녁밥 내기’를 하는 아마추어들도 몰래 공을 흘리는 일명 ‘알까기’를 하는 동반자와는 다시는 같이 골프를 치지 않는다. 하물며 10억 원 내외의 큰 상금이 걸린 대회를 1년 동안 30여 차례나 치르는 엘리트 선수들이라면 당연히 속임수를 썼던 선수와의 경쟁을 반기지는 않을 것이다.

윤이나가 2022년 6월 16일 경기 양주시 레이크우드 컨트리클럽(파72)에서 열린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투어 에버콜라겐 퀸즈크라운(총상금 8억원) 3라운드 6번홀에서 홀아웃을 하고 있다. KLPGA 제공

KLPGA의 윤이나 징계 과정을 보면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보는 듯하다. 제2차 세계대전에 미군 소속으로 참전한 4형제 중 마지막 남은 막내아들 라이언 일병을 살리기 위해 8명의 대원이 힘겹게 적진을 뚫고 구출 작전을 펼친다. 작전은 성공하지만 대원들의 피해는 컸다. 8명의 대원은 1명의 생명이 8명의 생명보다 더 가치가 있는 것인지에 끊임없는 혼란에 빠진다.

이번 결정은 KLPGA가 흥행과 골프 본연의 가치를 맞바꾼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대형 스타 재목 윤이나 1명을 살리기 위해 나머지 140여 명의 선수들을 희생시켰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KLPGA는 골프에서 가장 중요한 ‘정직 원칙’과 ‘공정’도 희생시켰다. KLPGA는 속임수를 쓰더라도 얼마 지나지 않아 경감이 될 수 있다는 ‘윤이나 법’ 신호를 선수들에게 직접 보낸 것이나 다름없다.

미국 공공정책 연구소 데모스의 공동설립자 데이비드 캘러헌은 자신의 책 ‘치팅 컬처’에서 “규칙을 깨는 사람이 상을 받거나 이득을 얻는 것을 경험할 때, 규칙을 따르는 사람들은 되레 손해를 보고 있다고 느끼고 결국 이들도 속임수를 택하게 된다”고 얘기한다.

‘윤이나 법’을 직접 경험한 선수들은 손해를 보고 있다고 느낄 것이고, 그들 역시 한 타에 희비가 갈리는 순간이라면 속임수를 택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는 흥행이라는 상업논리만 따르면서 공정 경쟁이라는 스포츠 가치를 가볍게 여긴 KLPGA가 앞으로 감당해야 할 몫이 됐다. 속임수가 허용되고 규칙이 무너지면 그 게임은 무법천지나 다름없다. 그런 경기를 보며 환호와 박수를 보낼 스포츠 팬은 없다. KLPGA의 '윤이나 프로 구하기' 뒤끝이 영 개운치 않다.

김기중 스포츠부장 k2j@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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