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재원의 정치평설] ‘자객공천’ 유감

차재원 부산가톨릭대 교수 2024. 1. 26.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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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재원 부산가톨릭대 교수

오는 4월 10일 치러지는 제22대 총선을 특징짓는 키워드 중 하나가 이른바 ‘자객공천’이다. 최근 벌어진 대통령과 여당 대표의 공개 충돌. 그 단초 역시 여기서 비롯됐다. 국민의힘 한동훈 비대위원장이 더불어민주당 정청래 최고위원을 잡기 위한 자객으로 김경률 회계사(국민의힘 비대위원)를 전격 내세우자 윤석열 대통령이 발끈한 것. 본격 심사 이전에 그를 사실상 당 후보로 낙점한 게 공정하고 투명한 공천 시스템을 뒤흔든 사천(私薦)이란 주장이었다. 물론 충돌의 본질적 이유는 ‘김건희 리스크’ 대응에 대한 견해 차였다. 그런데도 대통령실은 짐짓 외면한 채 계속 자객공천의 문제만 물고 늘어지고 있다.

계파 간 갈등이 불거진 민주당 내에서도 자객공천은 ‘뜨거운 감자’다. 이재명 대표와 대립각을 세워온 ‘비명(비이재명)’계 현역 의원 지역구에 주류 ‘친명(친이재명)’계 원외인사들이 대거 출사표를 냈기 때문이다. 당 공천권을 놓고 현역과 원외 인사 간 다툼은 당연한 노릇. 문제는 방송 출연 등으로 인지도와 나름 ‘스피커’를 장착한 친명계 ‘빅마우스’들이 마치 짜기라도 한 듯 비명계 핵심 의원을 한 명씩 겨냥한 모양새라는 점이다. 이 대표 측근을 비롯한 친명 현역은 쏙 빼놓았기에 비명계 제거를 위한 전형적 자객이라는 얘기까지 나온다. 강성 지지층 ‘개딸’들도 겉 다르고 속 다른 행보를 보여온 비명 ‘수박 깨기’라며 환호하고 있다.

사실 자객공천은 부산 출신 3명의 대통령과도 인연이 깊다. 먼저, 자객으로 나서 급기야 대권까지 거머쥔 인물이 노무현 대통령이다. ‘6.10 민주항쟁’ 이후 첫 번째 국회의원 선거였던 지난 1988년 제13대 총선. 여당 민주자유당은 부산 동구에 전두환 정권 실세, ‘쓰리(3) 허(許)’의 한 명이었던 허삼수 전 보안사 인사처장을 공천했다. 이에 통일민주당 김영삼(YS) 총재가 고심 끝에 꺼낸 카드가 ‘인권변호사 노무현’. 독재정권 ‘충복’에 그가 맞춤형 저격수라고 봤다. 민심은 YS의 자객공천에 폭발적으로 호응했다. 그의 당선뿐만 아니라 ‘부산 싹쓸이’로 이어졌다. 이렇게 탄생한 노무현 의원은 이후 5공 청문회 스타를 거쳐 제16대 대통령이 됐다.

반면 YS는 그 자신이 자객공천의 표적이 된 바 있다. 1971년 제8대 총선, 부산 서구에 출마한 YS의 대항마로 박정희 정권은 박찬종 검사를 깜짝 발탁했다. YS의 경남중 새까만 후배였던 그는 여러모로 비교됐다. ‘고시 3관왕’에 논리적 언변을 갖춘 젊은 수재의 도전. 제1야당 신민당 원내총무로 선명 투쟁을 이끌던 투사형 정치인의 방어. 결과는 YS의 압승이었다. 이후 부산은 1992년 YS의 대통령 당선까지 든든한 정치적 뒷배가 됐다.

문재인 대통령도 자객공천을 비껴가지 못했다. 그가 늦깎이로 정치에 처음 등장했던 무대가 2012년 19대 총선, 부산 사상구. 여당 새누리당은 27세의 여성 손수조를 전격 공천했다. 그러나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낸 ‘노무현의 친구’와 변변한 사회적 이력조차 없던 젊은 패기의 대결. 누가 봐도 승부는 빤했다. 당시 여당의 전략은 이른바 ‘김빼기’ 작전. 구색만 갖춘 후보를 내세워 총선에서 사실상 ‘문재인 지우기’를 시도한 것. 완전히 역발상 차원의 자객공천이었다.

자객공천은 그만큼 한국정치에 뿌리가 깊다. 그렇다고 당연한 전통 또는 바람직한 관행이라고 할 수 있을까. 절대 그렇지 않다. 민주주의 근간으로서의 선거 기능을 훼손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선거의 최우선적 기능은 국민 대표의 선출. 자객공천은 철저히 정치공학적 계산에 따라 상대에 치명적 타격을 가할 후보를 ‘내리꽂는’ 방식이다. 당연히 지역 현안이나 유권자들과의 접점 고리가 약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당선된 자객은 선거구민보다는 공천권자의 이해부터 좇을 공산이 짙다. 그동안 우리 정치가 극단적 대결로 치달은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더 큰 문제는 국회의원이 강성 당론에 얽매여 개별 헌법기관으로서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선거를 통해 국민 주권을 위임받은 입법자로서의 민주적 정당성을 스스로 허무는 꼴이 돼 버린다. 그러니 국민 4명 중 3명은 국회를 믿지 않고 있다(2022년 한국의 사회지표). 다양한 국민 의사를 집약해 그 결과에 승복하게 함으로써 정치적 통합을 이끄는 선거 기능도 마비될 수밖에 없다. ‘사람을 몰래 죽이는 일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 자객이 품고 있는 섬뜩한 뜻처럼, 이들이 투입된 선거는 정말 ‘죽기살기식’으로 진행된다. 상대에 대한 악마화가 후보뿐만 아니라 지지층 사이에서도 극대화된다. 공약과 정책 대결은 거의 기대할 수 없다. 열이면 열, 해당 지역은 극심한 선거 후유증으로 정치적 몸살을 앓아야 한다.

정권 쟁취가 목적인 정당 입장에선 자객공천을 아예 외면할 순 없다. 관전자로서도 재밌기도 하다. 그렇다고 본격 선거전이 벌어지기도 전에 이게 판세를 좌지우지하는 형국은 정말 문제다. 선거를 통해 국민주권주의를 실천하려는 유권자의 눈과 귀를 가리기 때문이다. 표심이 정확히 반영되지 못한 결과는 ‘선거 불복’으로 이어진다. 진영 간 갈등과 대립은 더 깊어지고 첨예화된다. 이런 악순환을 막는 것은 결국 우리 모두의 몫이다. 자객이 설칠수록 유권자가 더 냉정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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