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스타인 선수들 ‘110′ 숫자 팔뚝에 새기고 16강 기적 이뤘다
지난 24일 팔레스타인 국가대표 축구 선수들 팔뚝에는 ‘110′이라고 쓰여 있었다. 카타르 도하 아시아축구연맹(AFC) 아시안컵 조별 리그 3차전. 홍콩과 경기를 앞두고 있었다. 반드시 이겨야 16강을 바라볼 수 있는 처지. 110은 110일을 뜻한다. 이날이 지난해 10월 7일 팔레스타인 가자지구를 거점으로 한 이슬람 무장 단체 하마스가 이스라엘 침공을 감행하면서 전쟁이 시작된 지 110일 되는 날이었다.
팔레스타인 대표팀의 이번 대회 최대 목표는 ‘자국민을 위로하는 것’이었다. 미드필더 오데이 카룹(31· 힐랄 알쿠드스)은 개막전에 앞서 “조별 예선을 통과해 우리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행복을 주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하마스는 국제사회로부터 공인받은 팔레스타인 자치정부(PA)와 성격이 다르다.
쉬운 도전은 아니었다. 팔레스타인은 지난 2015년 호주 대회에서야 처음으로 아시안컵 본선에 진출했다. 결과는 3패. 조별 리그 탈락. 1득점 11실점을 했다. 2019년 아랍에미리트(UAE) 대회에서도 본선에 나갔다. 이번엔 2무 1패. 무득점 3실점이었다. 그래도 또 조별 리그 탈락.
삼세번 도전인 이번엔 각오가 달랐다. 공격수 마흐무드 와디(30·아랍 컨트랙터스)는 첫 경기를 하루 앞둔 13일 “바로 30분 전 내 사촌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울먹였다. 이어 “전쟁 한가운데에서 우리 국가가 기뻐할 만한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 당장은 아무 생각 없이 대회에 집중하겠다”고 말했다. 가자지구 출신 수비수 무함마드 살레(31·무소속)는 가족 생사조차 모르고 있다. 살레는 “며칠 전 삼촌 집이 폭파됐고 사촌들이 다쳤다”며 “신이 그들을 보듬어 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2경기 1무 1패(골득실 -3). 홍콩을 넘어서야 16강 희망을 살릴 수 있었다. 이번 대회는 각 조 3위 6팀 중 상위 4팀까지 16강에 오른다. 팔레스타인이 비기거나 지면 A조 중국(2무 1패)에 골득실에서 밀려 또 조별 리그 고배를 들 수 있었다. 다행히 객관적 전력은 팔레스타인(FIFA 랭킹 99위)이 홍콩(150위)보다 앞섰다.
팔레스타인 선수들은 경기에 앞서 비장한 표정으로 국가를 불렀다. “나는 불가능을 정복했고 전선을 넘나들었다... 팔레스타인은 나의 집이요, 승리의 길”이란 가사였다. 전반 12분, 팔레스타인 오다이 다바(26·샤를루아)가 오른쪽에서 올라온 공을 머리로 골대 오른쪽에 집어넣었다. 다바는 두 팔을 양쪽으로 뻗고 기쁨을 만끽했다. 관중석에서는 팔레스타인 국기와 카피예(무슬림 스카프)가 휘날렸다. 팔레스타인은 후반 5분 기세를 몰아 제이드 쿤바르(22· 알무카베르)가 헤딩으로 추가 골을 넣었다. 달아오른 경기에 마침표를 찍은 건 선제골 주인공 다바였다. 후반 15분 골대를 맞고 튀어나온 공을 정면에서 다시 밀어 넣었다. 팔레스타인은 3대0으로 이겼다.
심판이 경기 종료를 알리는 호루라기를 불자 살레는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인 채 오열했다. 그는 “지금 기분을 말로 표현하지 못하겠다. 가자지구 주민들이 우리 경기를 보고 행복해하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다른 선수들도 서로 얼싸안고 눈물을 흘렸다. 팔레스타인이 아시안컵에서 거둔 첫 승리이기도 했다. 카룹, 와디 등 선수들은 팔뚝에 ‘110′ 숫자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응원단과 감격을 공유했다. 튀니지 출신 마크람 다부브(52) 팔레스타인 감독은 “팔레스타인 국민을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 16강 진출이라는 목표를 이뤘다. 우리는 앞으로 더 나아갈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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