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태백 가는 길
지형이나 고사를 반영하여 지은 지명은 단순한 명사가 아니다. 수많은 선인들의 발자국이 온축되어 있다. 천명을 받아 한생을 꾸렸다가 이제 짐을 벗고 하늘로 돌아가신 분들, 멀리 지구를 굽어보면서 땅의 이름을 등대 삼아 눈에 밟히는 생시의 동네를 헤아리고 계실까.
청량리에서 출발한 무궁화 눈꽃기차는 고을마다 엎드린 역을 차례차례 짚어나간다. 내리는 손님 그만큼, 또 타는 승객 이만큼. 덕소(德沼)와 양정(養正)을 지나더니 금방 은행나무 아래 용문(龍門)이다. 고장의 이름들이 징검다리처럼 하나의 느낌으로 꿰어지고 나는 기꺼이 거기에 사로잡힌다.
순식간에 석불(石佛) 지나 일신이다. 일신우일신이라고 할 때와 꼭 같은 그 日新이다. 기차가 길을 재촉하여 그윽한 삼산(三山) 다음 기착한 곳은 원주(原州)다. 原은 그야말로 本과 어금버금하니, 근본에 대한 기운이 깊숙이 일어나는 곳.
다시 제천, 영월을 지나니 여기서부터는 석탄 냄새도 물씬해진다. 민둥산 떠나 이른 곳은 예미다. 기차가 건널목에서 속도를 늦출 때, 어느 쇠락한 담벼락에 이런 글귀. “父母有命 俯首敬聽(부모유명 부수경청). 부모께서 명함이 있으시거든 머리를 숙이고 공손히 들어라.” 예미는 禮美이니 어쩌면 저 문투에 딱 어울리는 풍경이 아닐 수 없겠다.
함백(咸白), 고한(古汗)도 지나 멀리 두문동재를 바라보면 석회암 지대의 야생화를 찾아 두루 쏘다녔던 날이 어제 같다. 여기서 가까운 정선(旌善)의 반론산(半論山)에 오르며 그 범상치 않았던 산 이름을 중얼거렸던 기억. 마침내 태백에 도착했다. 한자는 다르지만 <논어>의 한 편명과 같아서 여지없이 그 속으로 미끄러져 가는 기운을 아니 느낄 수 없는 고원 도시, 太白. 플랫폼에 내려 이정표를 보니 다음 역이 문곡(文曲)이다. 그야말로 문자향의 곡조가 울려나는 이름이 아닌가. 도계(道溪)도 여기서 멀지 않다. 사방의 지명에서 풍기는 군자의 향기!
태백에는 낙동강과 한강의 발원지가 있다. 여기서 출발해서 멀리 바다까지 꿈틀꿈틀 가닿는 강원의 힘. 올해의 간지를 상기하면서 좀전에 떠나온 방향으로 눈을 돌리면, 황해 건너 대륙을 상대하는 청룡의 머리쯤에 인천이 있구나, 살구씨처럼 야무진 仁川.
이갑수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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