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자의 작은 이야기] 사람값과 목,숨,값,

기자 2024. 1. 25.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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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값’이 아닌 ‘집’이 소중한 사람이 되게 하소서

‘학벌’이 아닌 ‘상식’이 소중한 사람이 되게 하소서

드높은 ‘명예’보다 드러나지 않는 ‘평범’을 귀히 여기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소수의 풍요’보다 ‘다수의 행복’을 우선하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독점과 지배’보다 ‘공유와 사랑’이 필요한 사람이 되게 하소서

‘사람’만이 최고라는 생각을 버리고 살아 있는 모든 것 앞에 경배하는 인간종이 되게 하소서

-시 ‘사람값’, 송경동 시집 <내일 다시 쓰겠습니다>

며칠 동안 내린 눈으로 세상이 하얗다. 산도 논도 밭도 비닐하우스도 지붕도 모두 새하얗다. 평등하게 희다. 눈이 오면 꼼짝없이 산골에 갇힌다. 새들과 산고양이는 뭘 먹고 이 한파를 견디나. 어젯밤 이 언덕길까지 올라와 스티로폼 박스를 눈 위에 던지고 간 택배기사는 오늘도 빙판길을 오르내리고 있겠지. 거창 산골의 그 꼬불꼬불한 길도 얼어 있겠지.

작년 마지막 날은 경남 거창에 갔다. 강연 겸 나눔은 일찍 끝나고, 비 추적추적 내리는 겨울밤을 옛 선배 임혜숙과 정쌍은 집에서 함께 보냈다. 두 분은 거창 산골에서 30년 이상 포도농사를 지으며 와인도 만드는 진짜배기 농부가 되어 있었다. 근처 성주에서 참외농사를 지으며 농민의 권익을 위해 헌신해온 윤금순씨와 강연을 주선한 사과 농사꾼 이이화씨의 고등학교 은사님도 함께했다. 다리를 절며 임혜숙 선배가 슬쩍슬쩍 내놓는 밥상엔 평안도식 김치밥과 시래기된장국과 안동찜닭이 이어졌다. 밤늦게까지도 모자라 아침 밥상머리와 떠나기 직전까지 이야기꽃이 피었다.

희망이 없다, 탄식하는 소리가 압도적인 세상에서 말보다 희망을 만들어가는 사람들을 보면 힘이 난다. ‘상식’보다 ‘학벌’이, 드러나지 않는 ‘평범’보다 드높은 ‘명예’가 갈수록 대접받는 세상에서, ‘공유’와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을 보면 접혔던 희망의 날개가 확 펴진다. 희망을 간절히 떠올리는 사람은 다급하고 절박한 이들이다. 그래서 악을 쓰며 싸운다. 악쓰지 않으면 아무도 모르고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취급받으니까. 이를 악물고서라도 지푸라기 같은 희망 한 조각을 붙잡는 게다.

최근 단숨에 읽은 이문영의 소설, <왼쪽 귀의 세계와 오른쪽 귀의 세계> 속의 몇 문장이 이명처럼 울리는 듯하다. “목, 숨, 값, 달, 라”며, “줄에 매달려 붉은 페인트로 휘갈긴 소리가 빌딩 벽에서 붉게 부르짖고 있다.” “빌딩을 하늘까지 쌓아올리고도 일한 돈을 받지 못한 남자”가 “매미처럼 달라붙어” 쓴 글자다. 다큐보다 더 실감 나는 소설을 보며 아직은 늦지 않았다는 생각이 새삼 든다. “세로로 매달려 만든 문장에” 자신도 “매달려 페인트를 칠”하며 빨갛게 아우성치던 글자들을 발음하는 사람을 보면. 점처럼 보이는 존재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사람들을 보면, 절망도 사치구나 싶다. 공장 굴뚝에 매달려 공장 재가동과 고용 승계를 요구하는 노동자의 목소리를 들려주는 사람을 보면.

그제는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와서 받았더니 아는 사람이었다. 15년 동안 나와 딸의 이사를 도와준 이삿짐센터 사장님 부인이었다. 대뜸 쌀을 보내주고 싶다 했다. 직장 다니며 가끔 고향 내려가 농사를 짓는다는 말은 들었지만 쌀농사까지 하는지는 몰랐다. 얼떨결에 받겠다고 했지만 미안한 중에도 얼굴이 펴지는 것이 느껴졌다. ‘풍요’한 소수보다 ‘다수의 행복’을 우선하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더 다수인 것 같아서. 남의 집 이사가 직업이지만 자기 집은 없는 그분들이야말로 “‘집값’이 아닌 ‘집’이 소중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 같아서.

머지않아 음력 새해가 시작된다. 입춘을 앞두고 송경동의 ‘사람값’을 소리 내 읽는다. “‘사람’만이 최고라는 생각을 버리고 살아 있는 모든 것 앞에 경배하는 인간종이 되게 하소서”. 누군가의 눈물과 핏방울과 한숨이 있는 곳에서 팔딱거리는 심장으로 듣는 귀가 되게 하소서. 상식과 평범과 공정이 대접받는 세상이 되게 하소서. 사람값 하며 남의 목숨값을 허투루 여기지 않는 세상을 만들어가는 새해가 되게 하소서.

김해자 시인

김해자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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