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와 성찰] 정말 두려워해야 할 것들
바야흐로 정치의 계절이 다가왔다. 대한 추위가 무섭지만 정치권은 뜨겁기 이를 데 없다. 거대 양당의 틀 안에서 달음질하는 이들도 있고, 새로운 정치를 표방하며 판을 다시 짜느라 이합집산하는 이들도 있다. 출사표를 낸 이들은 저마다 경세가를 자처한다. 좋은 세상을 만들려는 순정한 마음으로 나선 이들도 있고, 허망한 열정에 들떠 나서는 이들도 있다. 유권자들의 분별력이 그 어느 때보다 요구되는 상황이다.
박석무 선생의 <다산의 마음을 찾아>를 읽다가 우리 시대를 비춰주는 것 같은 한 대목과 만났다. 다산은 퇴계가 제자 이중구에게 보낸 편지의 한 구절에 주목한다. 퇴계는 ‘세상이 나를 알아주지 못한다’고 한탄하는 사람들을 보며 그런 탄식이 자기에게도 있다고 고백한다. “나의 경우는 학문이나 능력이 텅텅 빈 사람인데도 그런 줄을 알아차리지 못함에 대한 탄식이라네.” 대학자의 겸허한 자기반성이다. 다산은 그런 퇴계의 글을 읽다가 문득 두려움을 느낀다. 그는 자기 재능이 부족하다고 느끼는데 사람들은 도리어 그의 ‘기억력이 뛰어나다’고 칭찬했기 때문이다.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모르는 사이에 땀이 나고 송구스럽다. 이를 태연히 인정하여 남들이 속아줌을 즐기다가 진짜 큰일을 맡기는 경우 군색하고 답답함에 몸 둘 곳이 없을 터이니 매우 두려운 일이다.” 성경의 한 지혜자도 같은 취지의 말을 했다. “은금의 순도는 불에 넣어 보면 알 수 있고, 사람의 순수함은 조금만 이름이 나면 알 수 있다.” 무서운 말이다. 자기가 한 일보다 더 높은 평가를 받는 사람은 불행하다. 그 평가는 언제든 냉혹한 적대감으로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능력을 과시적으로 드러내려 한다. 은인자중하는 이들은 비존재 취급을 받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정치의 장에선 특히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 위해 자극적이고 서슬 퍼런 언어를 함부로 사용하는 이들이 많다. 최소한의 품격이나 역사의식조차 못 갖춘 이들이 사람들의 눈과 귀를 어지럽히는 일이 다반사다. 품성이 모질지 못해 말을 조심스럽게 하는 이들은 대중의 시선을 받지 못한다. 흉기가 된 말들이 세상을 떠돈다. 무심히 지나던 이들도 그 말에 찔려 상처를 입기도 한다. 우리 가슴엔 그런 말들에 베인 자국이 무수히 많다. 상처의 기억이 누적될수록 마음의 여백과 정신의 회복탄력성은 점점 줄어든다. 조그마한 차이도 용납하지 못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플라톤의 철인왕까지는 기대하지 못한다 해도 인문적 교양을 갖춘 이들이 국민의 대표가 되었으면 좋겠다. 복잡하고 다양한 인간의 실상을 깊이 통찰하고, 주변화된 이들의 소리를 귀담아듣고, 역사가 지향해야 할 방향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가진 사람이 필요한 시대다. 그는 또한 우리 시대가 직면한 다양한 위기를 직시하고 그 위기를 헤쳐 나갈 실천적 지혜를 갖추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의 사고는 유연해야 하고, 인간 존중이 그의 심성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해야 한다. 다른 사람들을 깎아내리는 것으로 자기 존립 근거를 삼으려는 사람들, 버럭버럭 피새를 부려 다른 이들의 입을 막아버리는 사람들이 역사의 무대에 오른다면 역사는 퇴행하게 마련이다.
막스 베버는 <소명으로서의 정치>에서 정치에 대한 소명을 가진 사람은 희망의 좌절까지도 견뎌낼 수 있을 정도의 의지를 갖추어야 한다고 말한다. “자신이 제공하려는 것에 비해 세상이 너무나 어리석고 비열하게 보일지라도 이에 좌절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 사람, 그리고 그 어떤 상황에 대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절실히 필요한 시대이다. 이런 책임 정치를 하려는 이들이 많아져야 한다.
정치는 어지럽고 경제는 어렵고 남북관계는 악화일로다. 기후위기는 이제 징후를 넘어 일상적 현실이 되었다. 머리를 맞대고 지혜를 짜내어도 난마처럼 얽힌 현실의 실타래를 풀기 어렵다. 오만하고 무지하고 무정하고 남의 소리를 겸허하게 들을 생각이 없는 이들에게 우리 주권을 맡기는 것은 섶을 지고 불 속에 뛰어드는 일과 다를 바 없다. 두려운 일이다.
김기석 청파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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