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과 눈이 빚어낸 설국

김보라/정영효/김은아 2024. 1. 25. 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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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ver Story
더 늦기 전에 가야 할 눈꽃여행


설경은 두 얼굴을 하고 있다. 누군가에겐 살아가기 위해 정복해야 할 두려움의 대상이지만, 누군가에겐 계절을 온전히 느낄 수 있는 일상 속 축복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21세기를 사는 도시인들에게 눈 풍경은 마음속 로망이자, 신비로움 그 자체다. 한 계절이 지나면 허무하게 사라질, 순백의 자연을 인간은 한없이 열망한다. 잊고 있던 동심의 소환이자, 만물이 다시 살아날 봄에 대한 기대감 때문일까. 그 답은 함백산과 덕유산, 한라산과 소백산 등 대한민국 ‘눈꽃산행 명소’에 겨울마다 줄을 서는 등산객들의 마음속에 있다.

우리는 언제까지 이 설경을 볼 수 있을까.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덮어버리는, 순백색의 눈꽃을 볼 수 있는 시한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병충해로 상고대의 절경을 이루던 나무들이 죽어가고, 기후 위기로 인해 세계 최고봉인 프랑스 몽블랑의 눈이 녹아내리고 있어서다.

더 늦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겨울 여행지 두 곳을 소개한다. 일본에서 가장 깊은 땅 도호쿠의 해발 1500m ‘수빙(樹氷·얼음나무)’, 그리고 알프스 최고봉인 몽블랑 산자락 아래 산악도시 ‘샤모니몽블랑’이다.

‘아이스 몬스터(얼음 괴물)’라 이름 붙은 도호쿠의 자오에선 기묘하고 압도적 풍경 앞에 모두가 넋을 잃는다. 1924년 최초의 동계올림픽이 열렸던 샤모니 몽블랑의 매력은 ‘걸어서 누비는 알프스’다. 20㎞에 달하는 슬로프를 스키 없이도 즐길 수 있어서다. 알프스 곳곳의 스키장이 눈이 내리지 않아 폐장하는 요즘, 어쩌면 마지막이 될 수 있는 알프스 트레킹은 더 늦게 전에 어서 오라며, 지구인들의 발길을 재촉한다.

잠자는 괴물의 머리맡을 스쳐 지나 해발 1661m 얼음왕국으로 간다
아이스 몬스터가 사는 일본 도호쿠

수백만 그루의 수빙 위를 360도 파노라마로 내려볼 수 있는 자오온천스키장 로프웨이.


온천과 사케, 화산과 호수의 고장 도호쿠(東北)의 겨울이 깊어지면 대자연의 장관이 펼쳐진다. 눈과 얼음, 그리고 고산목의 질긴 생명력이 만드는 기적, 수빙(樹氷·얼음나무)이다. 최대 40m 크기의 얼음뭉치들이 일본에서 가장 깊은 땅 도호쿠의 해발 1500m 산등성이를 빽빽하게 채운다. 마치 인간 세계로 행군하던 괴물들이 순식간에 얼어붙은 것 같이 기묘한 광경. 이 풍경엔 ‘아이스 몬스터(얼음 괴물)’라는 이름이 붙었다.

풍경만 기묘한 게 아니다. 수빙 고원을 찾는 이들은 말로 설명하기 힘든 시각과 청각의 부조화에 매료된다. 당장이라도 천지가 떠나가도록 괴성을 지르고 몸부림칠 것 같은 수빙이 고원을 가득 채우는데, 사방 천지가 고요하다. 저 멀리 시베리아에서 불어오는 시린 바람 소리만 간간이 귀를 할퀼 뿐 얼음괴물들은 숨소리조차 내지 않는다.

수빙은 도호쿠지방 산간지대의 고산목이 얼어붙으면서 만들어 내는 자연현상이다. 산으로 둘러싸인 한국에서도 볼 수 있는 상고대와 그 생성 원리는 비슷하지만 외형은 천지 차이다. 상고대가 가냘프고 처연하다면, 수빙은 거대하고 위압적이다.

수빙이 세계적으로 드문 건 특수한 기상 조건과 식생의 만남 없이는 만들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차가우면서도 습기를 가득 머금은 시베리아 북서풍이 산간지대의 서쪽 경사면에서 아오모리 분비나무를 만나야만 탄생한다. 아오모리 분비나무는 도호쿠지방의 산간지대에서 볼 수 있는 침엽수. 높이 40m, 직경 1m까지 자란다. 시베리아에서 불어온 계절풍이 동해를 지나면 수증기를 머금은 눈구름을 만드는데, 이 눈구름이 혹한의 도호쿠 산악지대에 도달할 무렵이면 눈과 얼음이 뒤섞인 형태가 된다. 강한 북서풍이 눈과 얼음 가루를 흩뿌리면 아오모리 분비나무의 잎에 얼어붙어 수빙이 된다. 겨울이 깊어지고, 눈이 쌓일수록 수빙의 몸집은 더 우람해진다.

수빙으로의 여행을 서두르는 건 어쩌면 미래에는 볼 수 없는 풍경일지도 몰라서다. 2013년 병충해를 겪은 뒤 이 지역 아오모리 분비나무가 상당수 말라 죽었다. 아오모리 분비나무의 수령은 300년에 달해 워낙 성장이 느린 나무인 데다 도호쿠의 가혹한 산악지대에선 그 속도가 더 느리다.


도호쿠에서 가장 유명한 수빙 지대는 야마가타현 자오온천(王泉)이다. 자오연봉에서는 해발 1400m 지점부터 아오모리 분비나무가 자생한다. 자오온천에서는 다양한 방식으로 수빙을 감상할 수 있다. 온천마을에서 로프웨이를 두 번 갈아타면 1661m의 산 정상까지 오른다. 로프웨이에서의 18분 동안 하늘에서 파노라마로 펼쳐지는 수빙고원을 내려다 볼 수 있다. 산 정상에서는 산책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수빙을 보는 최고의 방법은 스키를 타는 것. 자오온천은 일본 최대 규모의 스키장 중 하나다. 조금 과장하자면, 산 하나가 아니라 산맥을 통째로 깎아 조성했다. 14개의 코스를 연결하기 위한 로프웨이역만 3개다. 3개 역에서 4개 로프웨이 노선이 운행한다. 코스와 코스를 잇는 리프트는 32개다. 1661m 자오산초역(王山頂)에서부터 최장 10㎞에 걸쳐 스노 파우더를 구름 위를 달리듯 내려올 수 있다. 이 중 수빙고원 코스는 얼음괴물들 사이를 비집고 8㎞를 활강하는, 자오온천 스키장의 하이라이트다. 수빙 사이를 지나는 리프트에 몸을 맡기는 순간은 평생 잊을 수 없는 시간이다. 잠자는 거인들의 머리맡 바로 옆을 스치듯 지나는 긴장감은 소름이 끼치도록 아름답다. 나도 모르게 숨소리를 죽인 채 수빙과 어깨를 나란히 하다 보면 잠시 지구가 아닌 곳에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든다.

도호쿠의 겨울 여행, 스키 여행의 맛을 북돋우는 건 꽁꽁 얼어붙은 몸을 단숨에 녹여주는 온천이다. 자오온천은 일본 굴지의 강산성 온천이다. 유황향 가득한 산성수에 몸을 담그면 피부 끝에서부터 전해져 오는 싸르르한 통증이 찾아온다.

자오를 비롯한 도호쿠 지역의 온천은 물을 탕에 가둬두지 않고 원천수를 그대로 흘려보내는 방식이 많다. ‘혹시 내 가죽이 벗겨지지 않을까’ 싶은 열탕도 상당수다. 그렇다고 찬물을 섞는 실수를 하진 말자. 이 지역 사람들은 탕에 새하얀 눈을 한가득 집어넣어 온도를 조절한다.

센다이 명물 우설구이 즐기고…우윳빛 뽀얀 온천서 몸 담그고
도호쿠 수빙이 있는 센다이는

야마가타 긴잔온천


자오온천은 도호쿠지방의 관문이자 최대 도시인 센다이(仙台)에서 차로 1시간, 기차로 1시간30분 거리다. 아시아나항공이 인천국제공항과 센다이국제공항 직항편을 주 7회 매일 운항한다. 겨울철 일본 풍경을 소개하는 사진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긴잔온천(銀山泉), 천공의 사찰 야마데라(山寺)가 자오온천에서 한 시간 이내 거리다.

소의 혀 구이인 규탄


센다이는 칠석마쓰리와 소혀구이(규탄), 콩요리(즌다)와 같이 독특한 문화와 요리로 유명하다. 기차로 한 시간 이내의 거리에 ‘일본 3대 풍경’ 가운데 하나인 마쓰시마(松島)와 전국구 온천 나루코온천(鳴子泉)이 있어 주변의 볼거리도 훌륭하다.

센다이에서 JR동일본패스(성인 3만엔)를 이용하면 도쿄와 간토, 도호쿠 전 지역의 신칸센과 JR 일반열차를 5일 동안 무제한 이용할 수 있다. 도호쿠는 온천팬들의 성지로 불릴 만큼 일본인들이 꼭 한 번 가보고 싶어하는 온천이 널려 있다.

아키타현 쓰루노유온천


‘1000명이 들어갈 수 있는 탕’이라는 뜻의 ‘센닌부로’로 유명한 아오모리현 스카유, 우유 빛깔의 뽀얀 온천수 아키타현 쓰루노유 등을 센다이에서 당일치기로 다녀올 수 있다. 먹는 사람이 “이제 그만” 할 때까지 한 입 분량의 소바를 무제한으로 제공하는 완코소바와 일본식 냉면과 자장면의 발상지인 ‘일본 면의 수도’ 모리오카, 지구상에서 몸값이 가장 비싼 스포츠 선수 오타니 쇼헤이의 고향 하나마키는 반나절 코스다.

파도가 뱉어낸 하얀 포말처럼…발아래로 첩첩雪山이 밀려드네
눈부신 설경의 알프스 몽블랑

세계 최장 스키 슬로프를 자랑하는 샤모니몽블랑


알프스 하면 스위스 융프라우요흐를 떠올리는 이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사실 알프스산맥은 프랑스 스위스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등 4개국에 걸쳐 뻗어 있다. 그야말로 ‘유럽의 지붕’이라는 별명 그대로다. 네 개 나라가 지닌 매력만큼 각 나라에서 만날 수 있는 알프스의 매력도 다르다. ‘최고’라는 타이틀에 매료되는 사람이라면 프랑스로 발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알프스 최고봉인 몽블랑이 프랑스에 있기 때문이다.

산악열차를 타면 몽탕베르까지 갈 수 있다.


4807m라는 아득한 높이의 산에는 ‘정복’이라는 과욕보다는 감상이라는 말이 어울릴 터. 그래서 거칠 수밖에 없는 곳이 바로 샤모니몽블랑이다. 이곳은 몽블랑산자락에 있는 산악 도시다. 이곳은 몽블랑 자락의 에귀유 뒤 미디, 메르 드 글라스, 몽탕베르 등 세계적인 명소로 향하는 거점이다. 이 덕분에 겨울뿐 아니라 사계절 내내 알프스를 탐험하고자 하는 전 세계 관광객으로 붐빈다.

샤모니몽블랑은 1924년 최초의 동계올림픽이 열린 역사적인 도시다. 겨울 스포츠, 특히 스키의 성지라는 말이 아깝지 않다. 20㎞에 달하는 세계 최장 슬로프를 포함해 수준별 다양한 슬로프를 갖추고 있다. 스키가 아니라 두 발로 알프스를 누빌 수도 있다. 전 세계 트레커의 버킷리스트라고 할 수 있는 투르 드 몽블랑 코스가 바로 샤모니몽블랑에 있다.

이곳에서만 즐길 수 있는 스키 문화도 있다. 바로 ‘애프터 스키’다. 프랑스에는 스키를 즐긴 뒤 모두가 어울려 시간을 보내는 일종의 뒤풀이 문화가 있다. 이때만큼은 처음 보는 사람들과도 격의 없이 어울리며 친구가 된다. 이 덕분에 전 세계의 모든 사람, 다양한 사회적 위치에 있는 사람과도 어울릴 수 있다. 샤모니몽블랑에서 전망대, 스키장 등 제반 시설을 운영하는 콩파니 뒤 몽블랑의 세일즈 디렉터 앙투안 뷔흐넷에 따르면 타이거 우즈 등 세계적인 셀러브리티와 잔을 기울이는 일도 심심찮게 벌어진다고. 국내 유명 아웃도어 브랜드 대표도 이곳에서 애프터 스키로 현지 관계자들과 연이 닿아 샤모니몽블랑에 매장을 열었다.

해발 3842m까지 올라가는 케이블카


샤모니몽블랑은 프랑스 스위스 이탈리아의 ‘카르푸’, 즉 교차로에 있다. 덕분에 걸어서 3개국을 여행할 수 있다. 샤모니몽블랑에서 트레킹하거나 파노라마 곤돌라를 이용하면 스위스 알프스 지역에 닿는다. 여기에서 케이블카를 타고 이동하면 이탈리아에 닿는다. 이렇게 세 개 국가를 오가는 데 걸리는 시간은 불과 1시간30분이다. 이동하는 과정에 별도의 입출국 심사가 없어 자유롭게 오갈 수 있다. 다만 여권은 항상 지참해야 한다.

몽블랑에서 반드시 가야할 스폿

●해발 3842m 전망대 에귀 뒤 미디

서유럽에서 가장 높은 산봉우리인 몽블랑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 샤모니 시내부터 에귀 뒤 미디 케이블카를 이용하면 해발 3842m의 오트·몽타뉴 초입까지 20분 만에 도착할 수 있다. 몽블랑을 비롯해 프랑스·스위스·이탈리아의 알프스 산맥을 360도 뷰로 한눈에 감상할 수 있다.

●아찔한 전망대 르 파 당 르 비드

알프스에서 인증샷을 남기고 싶다면 이곳으로 향하자. 해발 3842m에 있는 전망대로 투명한 큐브 형태의 유리 바닥 위에 올라서면 발아래 알프스가 펼쳐진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아찔할 정도의 스릴을 선사하는데 무서움을 이겨내면 근사한 인증샷을 남길 수 있다.

●伊까지 연결된 케이블카 파노라믹 몽블랑

에귀 뒤 미디 정상에서 출발하는 케이블카. 파노라믹 몽블랑을 이용하면 제앙 빙하를 넘어 이탈리아의 헬브로너까지 연결된 특별한 여행을 즐길 수 있다. 헬브로너 전망대에서는 심장이 쫄깃해지는 빙탑과 거대한 크레바스(빙하가 갈라져 생긴 좁고 깊은 틈)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두께 200m 거대 빙하 메르 드 글라스

길이 7㎞, 두께 200m로 프랑스에서 가장 거대한 빙하다. 빙하 위에 설치된 테라스에는 스낵바와 레스토랑이 자리해 이색적인 풍경을 바라보며 미식을 즐길 수 있다. 빙하 한가운데에는 자연 동굴이 있는데 내려가는 데 450보 정도 소요된다.

김보라 기자/야마가타·센다이=정영효 도쿄특파원/김은아 한국경제매거진 여행팀 기자 destinybr@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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