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판중심주의를 다시 생각한다 [이석태 칼럼]

한겨레 2024. 1. 25. 1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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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원 불체포특권은 제헌국회 때부터 인정되어온 헌법상 권리로, 공판 시작 전 체포를 면하게 한다는 점에서 불구속 재판과 유사하다. 개인이 사전에 불구속 수사를 전면 포기한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듯이, 불체포특권 포기 역시 생각하기 쉽지 않다. 불체포특권은 국회의원 개인의 권리이면서도 국회의 행정부 통제를 위해 헌법이 정한 원칙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석태│전 헌법재판관

지난해 12월11일 취임한 조희대 대법원장이 지난 2일 시무식에서 구속과 압수·수색 제도를 개선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조 대법원장은 이날 오전 10시 서울 서초구 대법원 청사에서 열린 시무식에서 헌법상 무죄 추정의 원칙을 언급하며 “헌법 정신에 따라 인신구속과 압수·수색 제도를 개선하고 적정하게 운용해 국민의 기본권을 보호하고, 피고인의 방어권 보장과 실체적 진실 발견을 조화롭게 구현하겠다”고 밝혔다. 이는 새해부터 검찰 등 수사기관의 지나친 강제수사를 적절히 제한하기 위한 사법적 통제를 강화해나가겠다는 다짐을 표명한 것으로 여겨진다.

법원이 인신구속에서 신중을 기하여야 한다는 입장을 적극적으로 밝히기 시작한 것은 2005년 9월부터 6년간 재임한 이용훈 대법원장 때부터였다. 피고인이 검사와 대등한 당사자로서 신변에 대한 압박 없이 공판에 참여하는 것은 형사소송 절차의 이상인 실체적 진실 발견을 위해서 꼭 필요한 일이다. 가족과 변호인의 접견이 어려운 수사관서가 아니라 법관이 주재하는 개방된 법정에서 유무죄를 다투는 것을 공판중심주의라고 하는데, 이 대법원장 시기부터 비로소 재판의 중요한 원칙이 되었다.

이용훈 대법원장은 특히 2006년 9월19일 대전고등법원 등을 방문한 자리에서 “검사들이 사무실에서, 밀실에서 비공개 진술을 받아놓은 조서를 어떻게 공개된 법정에서 나온 진술보다 우위에 놓느냐”며 “법원이 재판 모습을 제대로 갖추려면 검사의 수사 기록을 던져버려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그는 특히 “판사들이 사람을 구속하는 것을 사무 처리로 생각하는데 구속영장이 발부된 가족들에게는 재앙이나 다름없다”며 구속영장 발부와 관련한 법관들의 각성을 촉구했다.

2008년 1월 신설된 형사소송법 198조 1항은 “피의자에 대한 수사는 불구속 상태에서 함을 원칙으로 한다”고 하여 공판중심주의의 기초가 되는 불구속 수사 원칙을 규정하고 있다. 공판중심주의가 확립되면 법정에서 ‘실질적 증거조사'가 가능해진다. 법관은 재판 과정에서 검사와 피고인 및 변호인의 진술을 통해 증거에 대한 심증과 범죄의 실체적 진실에 접근하게 된다.

이처럼 인신구속 제도는 시간이 흐르면서 차츰 개선됐지만 압수·수색 제도는 여전히 수사권 남용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한 실정이다. 오히려 정보화가 대세가 된 오늘날 검찰의 영향력이 미치는 수사 범위는 한층 더 넓어진 것 같다. 수사기관은 수사에 필요한 단서와 증거를 얻기 위하여 법원으로부터 압수·수색영장을 발부받는다. 법원이 이를 적절하게 제약하지 않으면, 수사기관은 범죄와 연관되지 않은 피의자의 소지물 전체를 입수하고 이를 활용하려는 경향이 강화된다.

‘영혼까지 털린다’라는 말이 과장이 아닌 시대가 되었다. 특히 수사기관은 오늘날 ‘그 사람 자체’라고 할 정도로 많은 정보를 담고 있는 휴대폰을 압수하면, 한 사람을 둘러싼 유·무형의 인적·물적 관계 전부를 살펴볼 수 있다. 민감한 사생활 정보는 물론 의료 정보 등까지도 제3자에게 낱낱이 드러나게 된다. 따라서 개인정보 보호를 위해서라도 압수·수색에 대한 사법적 통제가 필요한 시점이 되었다. 법원도 그런 문제의식에서 구속영장 심사 때처럼 압수·수색영장 심사 때도 당사자를 불러 직접 심문한 뒤 발부 여부를 결정하는 쪽으로 개선책을 모색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되면 압수·수색영장은 법관의 대면 심리를 통해 사전 검토를 받을 터이고, 그 남용이 제어될 가능성이 커진다. 이는 인신구속 제한에 한정돼 있던 공판중심주의의 미비점을 보완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조 대법원장의 다짐이 의미 있게 다가오는 이유다.

한편, 공판중심주의에 대비되는 ‘조서재판’을 가능하게 했던 토대로 지목됐던 검사 피의자신문조서의 증거능력 관련 조항이 2020년 2월 개정되었다. 종래에는 적법한 절차와 방식에 따라 작성되고 그 내용이 피고인 진술과 동일하면 피의자신문조서는 증거로 사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때 법 개정으로 형사소송법 312조 1항이 “검사가 작성한 피의자신문조서는 적법한 절차와 방식에 따라 작성된 것으로서 공판준비, 공판기일에 그 피의자였던 피고인 또는 변호인이 그 내용을 인정할 때에 한정하여 증거로 할 수 있다”로 변경됐다. 결과적으로 객관적인 증거 없이 검사 조서만으로 유죄 판결을 선고하기는 어렵게 되었다.

최근엔 불구속 재판 원칙과 관련하여 국회의원의 ‘불체포특권’이 논란이 됐다. 현행범인이 아닌 국회의원은 회기 중 국회 동의 없이 체포되지 아니하며, 체포된 경우에도 국회의 요구가 있으면 석방하여야 한다는 원칙이다(헌법 44조). 영국의 의회 제도에서 유래된 이 제도는 현재 프랑스, 독일, 일본 등도 운용 중이다. 쟁점은 불체포특권 포기가 가능하냐는 것이다. 국회의원 불체포특권은 제헌국회 때부터 인정되어온 헌법상 권리로, 공판 시작 전 체포를 면하게 한다는 점에서 불구속 재판과 유사하다. 개인이 사전에 불구속 수사를 전면 포기한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듯이, 불체포특권 포기 역시 생각하기 쉽지 않다. 불체포특권은 국회의원 개인의 권리이면서도 국회의 행정부 통제를 위해 헌법이 정한 원칙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지난해 12월26일, 검찰 출신으로 얼마 전까지 법무부 장관으로 있었던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취임사에서 ‘우리 당은 국회의원의 불체포특권을 포기하기로 약속하시는 분들만 공천할 것이고, 그럴 일은 없겠지만 나중에 약속을 어기는 분들은 즉시 출당 등 강력히 조치하겠다’는 취지의 발언으로 시선을 끌었다. 앞서 말한 불구속 재판의 정신, 국회의 행정부 견제 역할 등을 고려하면, 불체포특권과 연관된 공천권 제약이나 그 포기 촉구는 고개를 갸웃하게 한다. 원칙적으로 의원 개인에게 맡길 일이지, 공당의 대표가 의원들을 압박해 일괄 선언하고 밀어붙일 일은 아닌 듯하다. 자칫 검사와 피고인의 대립 당사자 구조를 취하고 있고 그 최종 판결은 법관에게 있다는 공판중심주의의 실질을 체포라는 절차를 빌려 희석하는 것으로 보일 염려도 있다. 이 걱정은 지난해 중계된, 국회에서 의원 체포 표결에 앞서 상당 시간 일방적으로 해당 의원의 피의사실을 검찰에서 설명하였던 예에서 두드러진다. 우리가 모르는 동안 어느새 검사가 우리 사회 정의의 중요한 판명자가 된 것인지, 질문을 던져보고 싶은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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