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과 북, 문 활짝 열고 자유롭게 오가길 염원하셨죠”

한겨레 2024. 1. 25. 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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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된 조국의 통일을 그토록 바라던 장기수 김병호 선생이 지난 5일 급성폐렴으로 돌아가셨다.

"남북이 서로 으르릉거리지 말고 정치하는 사람들이 이남 국민이나 이북 국민이 서로 좋은 것을 보도록 해야 통일이 되는 것이지, 무력으로나 힘으로는 절대 통일이 안 됩니다. 이북 사람 이남 사람이 서로 자유롭게 볼 수 있도록 문을 활짝 열어놓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길이 빨리 오도록 희망하며 교회 다니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 정치인들이 마음 문을 활짝 열어서 가고픈 사람들 다 가서 보도록 간절히 바라고 늘 기도합니다. 그것이 제일 중요하지요. 서로가 통제만 할 것이 아니라 서로 볼 수 있도록 남북정치인들도 서로 가서 보고 그랬으면 좋겠어요." 고향을 그리워하는 물기가 젖어있는 고인의 음성이 지금도 생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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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신이의 발자취] 장기수 김병호 선생을 추모하며
지난해 원로 통일운동가들과 함께한 고인(앞 맨 오른쪽). 필자 제공

1965년 체포돼 23년 투옥 고초
석방 뒤도 ‘창살 없는 감옥’ 10년
세탁소 운영하면서 신앙 생활
“통일 위해선 남·북 자유왕래
가장 중요하다 하셨죠”

분단된 조국의 통일을 그토록 바라던 장기수 김병호 선생이 지난 5일 급성폐렴으로 돌아가셨다. 향년 86.

고인의 조부는 일제강점기에 고향인 충북을 떠나 평안북도 구장군 구장읍 사오리로 이사를 했다. 고인은 부친이 다시 이사를 한 평북 창성군에서 1938년 9월14일 출생했다. 1965년 인민군에서 복무하다 ‘통일 사업’의 임부를 부여받고 남으로 내려오던 중 체포되었다. 23년 세월 동안 복역하다 광주교도소에서 1988년 12월 21일 출소했다.

출소 이후 세탁소를 운영하면서 1남3녀 자녀를 두고 신앙생활도 열심히 했다. 하지만 석방 뒤 삶은 보안관찰법에 묶여 창살 없는 감옥이었다. 늘 감시와 함께 소소한 일상생활까지도 보고해야 했다. 그런 생활이 10년 가까이 된 것이다. 이런 일도 있었다. 알뜰살뜰하게 모아서 작은 집을 장만했다. 바로 경찰이 조사를 나왔다. 집을 마련할 돈이 이디 있느냐? 출처를 대라는 것이다. 혹시 공작금을 받아서 매입한 것은 아니냐는 추궁이었다.

장기수 선생님들은 가족이 거의 없다. 외롭게 지내고 생활이 넉넉하지 못해서 여행을 제대로 한 적이 없다. 그래서 2013년 오랜만에 선생님들과 전북 고창 선운사 나들이를 했다. 모든 분이 어린이처럼 좋아하신 장면이 지금도 그대로 남아있다. 필자가 그때 만든 다큐멘터리 ‘빗자루 도사 그리고 동지들’이 있다. 장기수 고 임동규 선생과 그분의 동지들 이야기이다. 그때 김병호 선생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평소 통일에 대한 속내를 털어 놓았다.

“남북이 서로 으르릉거리지 말고 정치하는 사람들이 이남 국민이나 이북 국민이 서로 좋은 것을 보도록 해야 통일이 되는 것이지, 무력으로나 힘으로는 절대 통일이 안 됩니다. 이북 사람 이남 사람이 서로 자유롭게 볼 수 있도록 문을 활짝 열어놓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길이 빨리 오도록 희망하며 교회 다니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 정치인들이 마음 문을 활짝 열어서 가고픈 사람들 다 가서 보도록 간절히 바라고 늘 기도합니다. 그것이 제일 중요하지요. 서로가 통제만 할 것이 아니라 서로 볼 수 있도록 남북정치인들도 서로 가서 보고 그랬으면 좋겠어요.” 고향을 그리워하는 물기가 젖어있는 고인의 음성이 지금도 생생하다.

돌아가시기 전에 장기수 어르신들과 함께 광주·전남 민주화운동 동지회의 지난 1년을 결산하고 새해를 다짐하는 시간이 있었다. 그때도 김병호 선생은 건강한 모습이었다. 그사이 병원에 입원하셨다가 퇴원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건강히 지내시라고 진한 도라지 배즙을 손에 안겨드렸지만 채 다 드시기도 전에 하늘나라로 이사를 갔다.

통일운동가 김병호 선생의 안식을 기원한다.

장헌권/목사·광주 기독교회협의회 인권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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