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햇발] ‘길 위에 김대중’, 청년들이 많이 봤으면
이창곤 |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얼마 전 다큐멘터리 영화 ‘길 위에 김대중’을 관람했다.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 김대중의 파란만장한 생애가 대형 화면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2시간이 언제 지나갔는지 모를 정도로 몰입했다. 특히 광주 망월동을 찾아 통곡하는 장면은 한동안 잊히지 않았다. 관람 며칠 전엔 김대중도서관에서 연 도서전시전을 둘러볼 기회도 있었다. 역대 한국 정치인 가운데 그토록 많은 책을 읽고, 때로는 국내외 언론에 직접 기고해 자신의 비전과 경제사회정책을 피력한 이가 있었던가.
영화를 관람한 뒤 한가지 의문이 솟았다. 김대중이 대한민국 정치사, 아니 현대사에서 매우 저평가돼 있지 않으냐는 것이었다. 함께 본 지인도 똑같은 의문을 표했다. 실상 김대중에 대한 평가는 국내외 온도 차가 크다. 워싱턴 정가 등 세계의 지도자들과 학계, 외신에선 김대중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지도자, 넬슨 만델라와 같은 평가를 받는다. 영화에도 등장한 미국의 저명한 한국 현대사 연구자인 브루스 커밍스는 “마키아벨리에게 교훈을 가르칠 수 있는 정치가”라고 평했고, 중국의 장쩌민 주석은 생전에 그를 존경의 뜻으로 ‘다거’(형님)라고 불렀다고 한다.
하지만 국내에선 역대 대통령에 대한 각종 선호도 조사에서 그가 첫 순위에 오른 적은 거의 본 적 없고, 진영과 이념에 따라 평가가 크게 엇갈린다. 지인은 노무현의 비극에 따른 ‘지못미 열풍’의 상황에서 서거했기 때문이 아닐까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연세대 김대중도서관의 장신기 박사가 저서 ‘김대중과 현대사’에서 이런 의문의 답을 조목조목 제시했는데, 그 또한 같은 점을 짚었다. “우리 정서엔 비극적으로 세상을 떠난 지도자에 대한 대중적 지지 심리가 강한”데, 박정희와 노무현은 여기에 해당하지만, 김대중은 갖은 고초를 겪고도 죽음의 고비에서 살아남았기에 “서거 이후 형성되는 역사적 인물에 대한 지지 현상에서 후순위에 위치하게 됐다”는 것이다.
2005년부터 김대중 관련 각종 사료 정리와 저술 작업에 참여한 장 박사는 “한국 사회의 반정치적 문화”를 저평가의 주요 이유로도 꼽았다. “한국 사회에서 정치적이란 표현은 순수함과 배치되는 부정적 뉘앙스를 주는데… 김대중은 ‘정치는 흙탕물 속에 피는 연꽃’과 같다는 신념으로 철저히 정치인의 길을 걸었고,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흙탕물에 뒹구는 것도 마다치 않았기” 때문이란 풀이다. 그 밖에도 “국가적 비전을 실현하기 위해 때로는 핵심 지지층의 의사나 이익에 반하는 정책 추진을 피하지 않았”고, 이름은 많이 알려졌지만 정작 구체적인 업적은 잘 알려지지 않은 점과 그의 측근들이 2003년 민주당 분당 사태를 겪으면서 정치적으로 밀려난 점 등도 거론됐다.
‘길 위에 김대중’은 탄생에서 1987년까지의 ‘민주투사 김대중’을 그렸다. 제작에 참여한 최낙용 시네마6411 대표는 필자에게 “1997년 대통령이 되기까지를 다룰 2편을 포함해 1~2편은 일대기를 다루고, 3편은 대통령의 삶과 한국 현대사에서 중요한 ‘어떤 사건’을 다룰 것”이라고 밝혔다. 어떤 사건이란, 아마도 6·15 남북공동선언을 이끈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이 아닐까 싶다. 평화주의자로서 김대중에 대한 조명이다.
개인적으로는 두가지 포인트에서 그가 재평가되고 부각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하나는 증오의 정치가 횡행하는 오늘의 정치 현실에 견줘 떠오르는 ‘포용의 정치 리더십’이다. 김대중은 민주화 투쟁 과정에서 독재정권의 정적들에 의해 죽음 직전까지 갈 정도의 숱한 박해와 탄압을 받았다. 그럼에도 그는 대통령 취임 뒤, 공약한 대로 박정희기념관을 짓는 데 도왔고, 보수적 인물을 초대 통일부 장관에 기용하는 ‘타협의 정치’를 보여줬다. 다른 하나는 복지 확대와 개혁으로 이 나라에 복지국가의 초석을 놓은 ‘복지 비전 리더십’이다. 경제적으로 신자유주의의 길을 갔다는 비판적 지점도 있지만, 고통받는 수많은 서민 중산층의 삶과 미래를 위해 기초생활보장제도 도입과 국민연금 개혁, 의료보험 통합, 의약 분업 등의 복지 개혁을 이뤄냈다.
각설하고 오늘의 많은 정치인과 시민들, 특히 20~30대 청년들이 이 영화를 많이 봤으면 하는 바람이다. 25일 오전 10시 현재 10만1866명이 이 영화를 봤다고 최 대표가 전했다. 누적 관람객 중 20대는 5%라고 한다. 최 대표는 “그분을 모르는 청년들이 대한민국 민주주의가 앞선 세대의 생명과 맞바꾼 소중한 결과물이란 걸 알아주고 현재 우리 세상을 직시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gon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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