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 만에 공식 인정 받은 비트코인 ‘디지털 금’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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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코인이 2009년 세상에 처음 등장하고 15년 만에 월가의 정식 투자 대상 자산으로 인정받자 ‘가상 화폐 전성시대’가 본격 개막할지 관심이 쏠리고 있다. 지난 10일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가 비트코인 현물 상장지수펀드(ETF)를 승인하며 가상 화폐 역사에 한 획을 그은 것이다. 비트코인 현물 ETF를 내놓은 자산운용사 블랙록은 상품 설명서에 “비트코인은 디지털 차원의 가치 저장 수단인 동시에 지정학적 위기나 통화 정책 차원의 혼란을 회피할 수 있는 자산”이라고 썼다. 지난해 7월 래리 핑크 블랙록 회장이 언론 인터뷰에서 “비트코인은 금을 디지털화한 것”이라고 한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그러나 비트코인의 성공 가능성을 아직 회의적으로 보는 전문가도 적잖다. 에스와르 프라사드 코넬대 교수는 WEEKLY BIZ 인터뷰에서 “비트코인 현물 ETF 승인은 가상 화폐를 금융시장의 주류로 끌어올린 ‘중대한 사건(milestone)’”이라면서도 “비트코인 자체가 투자의 대상이 되어버리면서 ‘중개인 없는 탈중앙화 금융’이라는 비트코인 고유의 목표는 허상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ETF 출시로 투자 자산으로서 가상 화폐의 위상은 높아지겠지만, 금과 같은 안정적인 가치 저장 수단으로서의 역할 등엔 차질이 있을 것이란 얘기다.
프라사드 교수는 코넬대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브루킹스연구소 선임연구원으로도 활동하는 석학이다. 2021년 이코노미스트지에서 올해 최고의 경제 서적으로 뽑힌 ‘화폐의 미래’를 비롯, ‘달러 트랩’ ‘통화 획득: 위안화의 부상’ 등 주요국 통화를 분석한 저서까지 펴낸 화폐 전문가로도 손꼽힌다.
◇실현되지 못한 비트코인의 약속
비트코인 선물에 투자하는 ETF는 이미 2021년 10월에 상장됐다. 하지만 선물 계약이 아닌 비트코인 자체가 투자 대상인 ETF는 2013년 자산운용사들이 SEC에 처음 승인을 요청한 지 11년 만에 미국 증권시장에 등장하게 됐다. 프라사드 교수도 비트코인 ‘현물 ETF’ 승인 자체는 의미 있는 사건으로 본다. 그는 “비트코인 현물 ETF의 상장은 개인 투자자들이 비트코인에 더 직접적이고 쉽게 투자할 수 있는 수단이 생겼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며 “가상 화폐가 공식적인 자산으로서 인정받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했다. 프라사드 교수는 ‘이더리움 ETF’처럼 다른 가상 화폐에 투자하는 금융 상품도 속속 출시될 것으로 내다봤다.
그러나 그는 부작용도 클 것으로 우려했다. 프라사드 교수는 “가상 화폐 시장에 더 많은 투자금이 쏟아질수록 시장 변동성이 커지며 개인 투자자들은 그만큼 더 위험에 노출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비트코인 현물 ETF 상장이란 사건을 ‘독이 든 성배’라 보기도 한다. 원래 비트코인은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 기존 금융기관과 정부에 대한 불신을 뿌리 삼아 태어난 ‘대안 화폐·자산’의 성격이 짙었다. 그런데 이러한 비트코인이 펀드라는 전통적인 금융 상품의 투자 대상이 되자, “비트코인을 탈중앙화된 화폐 체계로 만들겠다던 ‘패기 있는 목표’가 무너진 것”이란 비판이 나온다. 프라사드 교수도 “(비트코인 현물 ETF 상장으로) 신뢰할 수 있는 중재자 없이 탈중앙화된 거래가 가능할 수 있다던 ‘비트코인의 약속’은 결국 실현되지 못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다만 비트코인과 그 근간이 되는 블록체인 기술은 별도로 분리해 봐야 한다는 게 프라사드 교수 생각이다. 그는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인 미국에서도 성인 인구의 5% 정도는 전통적인 금융기관이 제공하는 저축·투자·결제 서비스에서 소외돼 있다”며 “블록체인은 저축하는 사람과 대출하는 사람을 금융기관 중개 없이 연결해 줄 수 있는 기술이란 점에서 여전히 의미가 있다”고 했다.
◇비트코인, ‘디지털 금’이 될까
프라사드 교수는 비트코인에 기대했던 통화나 안전 자산으로서의 기능도 박하게 평가했다. 비트코인을 교환의 매개로 쓰기엔 개당 가격이 너무 비싸고 가격 변동 폭이 크기 때문이다. 가령 지난해 10월 초 2만7983.75달러였던 비트코인 가격은 석 달 만에 68% 뛰어올라 이달 초에는 4만6970.5달러가 됐다가, ETF 상장이 된 뒤엔 하락세가 이어지며 22일에는 다시 4만달러 아래로 떨어지는 등 요동치고 있다. 더구나 결제 수단으로 쓰려고 해도 이더리움과 같은 다른 가상 화폐보다 느리고 불편하다는 설명이다.
프라사드 교수는 “비트코인이 안전 자산 성격이 짙은 ‘디지털 금’이 될 수 있다는 주장에도 동의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비트코인 가격은 다른 자산과 동일하게 거시 경제적 요인이나 규제 정책 변화의 영향을 받고 있다”며 “이는 비트코인이 인플레이션이나 금융시장 혼란에 대한 헤지(회피)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다는 뜻”이라고 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도 “2020년 이후 비트코인의 가격 흐름은 금보다는 투기적인 테크 주식으로 구성된 아크 이노베이션 ETF와 비슷한 모습을 보였다”고 전했다. 프라사드 교수는 “비트코인의 가치는 희소성(최대 수량이 2100만개)과 투자자의 믿음에만 근거하고 있다”며 “기업의 수익이나 자산을 근거로 주가가 적정한지 살펴볼 수 있는 주식과는 달리 밸류에이션(가치 평가) 모델도 없는 상태”라고 했다.
◇”실물 화폐는 살아남을 것”
프라사드 교수는 경제 정책의 체질 개선 없이 법정 화폐를 교체하는 시도만으로는 한 나라의 경제를 재건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그는 “2021년 엘살바도르가 비트코인을 법정 화폐로 채택하는 실험에 나섰지만 이러한 시도 하나로 수많은 경제 정책 실패를 만회할 수 없다고 본다”며 “오히려 비트코인의 큰 변동성 때문에 혼란을 겪을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하비에르 밀레이 아르헨티나 대통령이 대선 공약대로 미국 달러화를 국내 결제 수단으로 도입하거나, 많은 개도국이 CBDC(중앙은행 디지털 화폐)를 상용화하더라도 인플레이션이나 성장 침체 같은 경제적 문제를 단숨에 해결하는 만능 해법이 되기 어렵다는 견해다.
프라사드 교수는 현금의 종말 가능성도 낮게 봤다. 그는 “현금은 가상 화폐와 달리 인터넷 연결이 없어도 쓸 수 있고, 디지털상 흔적도 남기지 않는다”며 “디지털 결제가 아무리 확산되더라도 현금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비트코인의 목표
비트코인은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를 겪으며 제도 금융, 중앙정부에 대한 불신을 바탕으로 탄생한 만큼 ‘탈중앙화된 화폐 체계’를 목표로 2009년 태동했다. 누구도 개입·조작할 수 없는 화폐를 꿈꾼 것이다. 그러나 비트코인 ETF 승인은 기존 금융 상품의 투자 대상이 된다는 뜻으로 탈중앙화 목표에선 멀어졌다는 지적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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