듣기, 그 원초적 유혹
■김관숙 선거연수원 초빙교수
가장 먼저 깨어나는 감각 '청각'
목소리가 가진 힘
청각은 인간의 여러 감각 가운데 가장 먼저 깨어나고 가장 마지막으로 닫히는 감각이라고 한다. 아기는 엄마의 얼굴을 알아본다기보다는 사실 목소리에 제일 처음 반응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시기에 주 양육자가 다정하고 편안한 음색으로 아기를 부르고 어르는 것은 정말 중요한 자극이 된다. 배 속에 아기는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 양수를 거쳐 전달되는 부드러운 엄마의 목소리를 듣고 자란다. 그러고 보면 좋은 소리나 말을 들으라는 태교의 오랜 가르침은 꽤나 설득력 있다.
녹음으로 재생된 자신의 목소리가 왠지 낯설었던 경험이 누구나 한 번쯤은 있을 것이다. 보통은 실제 말할 때 듣는 자신의 음성이 마음에 든다고 한다. 기계에서 나오는 소리는 말할 때 듣는 소리와 대체 왜 다르게 들리는 걸까? 추측건대 공기라는 매질을 통해 전달돼 고막을 울리는 소리와 달리, 내가 말할 때 듣는 내 목소리는 귀로도 듣지만 내 몸통을 울리는 골전도 소리를 포함하기에 더 부드러운 것이 아닐까.
병원에서는 보통 심정지와 호흡이 끊긴 것을 확인하고는 사망 선고에 앞서 가족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할 기회를 주곤 한다. 연구에 따르면 모든 의학적인 사망 ‘사인’ 뒤에도 사람의 의식은 깨어있으며 감각 중에서도 청각은 가장 늦게 닫힌다고 한다. 그래서 혹여라도 망자 앞에서 고인을 비하하거나 재산 다툼이라도 한다면 참 서글프고 가슴 아플 것이다. 필자는 몇 년 전 시아버지의 임종을 지키며 속삭이는 인사를 드렸다. 애살스러운 성격이 아니어서 평소 아버님께 다정다감한 며느리는 아니었으나, 그 마지막 순간 아버님의 귓가에 이렇게 말씀드렸다. “아버님 걱정 마시고 이제는 편히 쉬세요. 저희 잘살게요.”라고. 그저 단순한 착각이었을까, 그 순간 아버님의 입가에 서린 희미한 미소를 본 것은.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조금만 높았더라면 역사가 바뀌었을 거라고 하지만 실제 클레오파트라는 미녀보다는 추녀에 가까웠다는 설이 있다. 그런데 왜 카이사르며 안토니우스며 뭇 남성들은 그녀에게 반했을까. 많은 이들은 그녀의 지성에서 그 이유를 찾는다. 그 당시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장서는 수만 권으로 세계적인 지성의 보고였다는데, 클레오파트라는 그 책을 모두 읽었다고 한다. 게다가 몇 개 국어에도 능통했다니 의사소통에서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필자는 필시 또 다른 이유가 있었으리라 유추해 본다. 어쩜 클레오파트라는 너무나 매력적인 목소리의 소유자가 아니었을지. 나긋나긋한 혹은 끈적끈적한 유혹의 목소리 말이다.
‘사이렌’은 프랑스의 한 물리학자가 자신이 발명한 경보 장치의 이름으로 명명하는 바람에 지금까지도 위험을 알리는 장치를 부르는 이름들로 쓰인다. 하지만 원래 사이렌은 아시다시피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아름다운 노랫소리로 뱃사람을 유혹해 죽음으로 인도한다는 바다 요정(괴물이 더 맞을 듯)의 이름이다. 너무나 매력적인 그 목소리를 들으면 누구나 정신을 잃고 바다로 뛰어들어 죽고 만다지. 신화 속 오디세우스처럼 몸을 단단히 묶거나 선원들처럼 자신의 귀를 틀어 막지 않는 한. 그러고 보면 소설 ‘모비딕’의 항해사 이름에서 딴 유명한 커피 체인이 스마트폰 주문 시스템에 ‘사이렌’이라고 이름 붙인 건 꽤 그럴듯하다. 신화 속 사이렌처럼 커피는 많은 이들에게 치명적인 유혹이 되곤 하니까 말이다.
듣는다는 것은 본능적이고 절대적인 행위이다. 그러니, 엄마들이여. 아이들에게 다정한 목소리로 이야기하자. 엄마들의 수다 상대는 아파트 옆집 엄마가 아니라 바로 자신의 아이들이어야 한다. 정서적 안정감과 어휘력까지 ‘엄마의 말하기’는 효익이 크다. 책을 읽어준다면 더욱 좋다. 많은 어머니들은 아이가 글자를 떼고 스스로 읽기를 시작하면 읽어주기를 멈춰버리는데, 참 안타깝고 슬픈 일이다. 듣기는 여전히 중요한 행위며 아이들은 들으면서 성장한다. 뇌의 듣기 영역은 늘 중요하고도 필수적인 자극을 요하기 때문이다. 부모 교육 때 “언제까지 읽어주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종종 받곤 한다. 정답은 없지만, 이것 만은 기억하자. 아이가 읽어 달라고 할 때까지 읽어주기를 멈추지 말자.
모두에게 첫사랑은 애틋하고 아련한 기억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가장 오래 남는 기억도 역시 목소리라고 한다. 많은 이들이 얼굴은 잊었지만, 목소리의 기억은 세월이 갈수록 더 또렷해진다고도 한다. 사람은 목소리로 추억 되는 것 같다. 최근 안타깝게 세상을 등진 한 국민배우는 다른 이들과 구별되는 중저음의 목소리가 아주 독특한 매력이었다. 사람을 만날 때의 첫인상 역시 생김새보다도 목소리가 좋으면 훨씬 더 좋은 느낌으로 기억된다. 그러니 오늘 밤엔 그리운 누군가에게 문자가 아니라 수화기 너머로 나지막이 속삭여보시길.
김관숙 선거연수원 초빙 교수 liberal@sedaily.comCopyright © 서울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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