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적 여성, 고전의 틈마다 그들이 있다
아름답다. 얌전하다. 사랑받는다. 여성이 ‘꽃’에 비유돼 아름다운 장식물로 여겨진 이래, 그리고 사람들이 여성을 사람으로 바라보기 시작한 이후, 수많은 용감하고 위대한 여성들이 꽃의 비유에 맞서고, 반박하고, 비틀어왔다. seri 글/비완 그림의 <그녀의 심청>은 그중에서도 예로부터 이어진 ‘꽃 프레임’에 독창적 해석을 덧붙여 그것을 정확히 꼬집고 부숴냈다. <그녀의 심청>은 <심청전>을 각색한 작품으로, 심청을 수양딸로 삼으려 했다던 장승상 댁 부인과 심청의 관계를 재해석했다.
이야기에서 장승상 부인은 비싼 값에 나이 많은 장승상의 후처로 팔려간 규수다. 가세가 기울어 지참금을 마련하지 못한 부인의 집안에서는 강에서 금자라를 낚아다 승상에게 바친다. 그런데 이 금자라는 사실 용왕의 아들로, 자라를 고아 먹은 승상은 앓아눕고 분노한 용왕은 인당수에 더는 배가 뜨지 못하도록 한다. 이야기가 왜곡돼 마을에는 여우로 둔갑한 부인 탓에 승상이 자리보전하고 인당수 물길이 막혔다는 소문이 돈다. 이에 사람들은 제물로 바칠 처녀를 구하고, 심청이 제물로 바쳐진다.
부인은 처음엔 심청을 꾀어 자기 대신 제물로 바칠 요량으로 심청에게 접근한다. 그러나 심청과 함께 지내면서 그간 강요받아온 예의범절과 ‘사랑받기 위한’ 태도를 꾸며내는 삶과는 다른 세상이 있음을 알게 된다. 비록 비렁뱅이 신세로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심청이지만 그는 부인과 달리 자유롭고 솔직하다. 한편 심청 역시 패물이나 음식 등을 얻을 속셈으로 부인 곁에 있는다. 그러나 자기를 다정하게 대하는 부인이 점점 더 소중해지고, 그를 통해 처음 ‘갖고 싶은 게 생기고, 지키고 싶은 게 생기는’ 것을 경험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소중해지는, 서로를 통해 새로운 세상을 보는 그들의 이야기는 ‘쌍방 구원 서사’다.
심청과 부인이 서로를 구원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이 서로 사랑했기 때문이다. 이 얼마나 당연한 말인가. 그러나 동성애가 자유롭지 않고, 동성끼리 있으면 ‘이상한 소문’이 나는 작중의 시대관에서는 그것이 하나의 금기를 깨는 사건이다. 서로를 사랑함으로써, 그리고 그 감정을 부정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임으로써 그들은 사회적 편견의 허들이 얼마나 높은지 알게 되고, 동시에 넘고자 마음먹는다면 넘을 수도 있음을 알게 된다. 터부시하는, 그러나 분명한 사랑의 감정은 이 만화에서 결국 모든 장애물을 뛰어넘는 동력이 된다. 방에 갇히고, 살해 위협을 받고, 배가 뒤집히는 절체절명의 위기 순간에서 그들이 떠올리는 것은 서로다.
이 만화에 나오는 다양한 여성상 중 신스틸러는 단연코 뺑덕어멈이다. <심청전> 원전에서 뺑덕어멈은 심봉사의 재물을 훔쳐 달아난 부덕한 여성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그녀의 심청>에서는 눈먼 아버지를 모시며 비렁뱅이로 살아가는 심청에게 씻는 법을 가르쳐주는 등 심청을 어릴 때부터 돌봐준 사람이다. 주위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심청이나 자신에게 틀을 강요하고 성추행하는 사람들을 곧바로 응징한다. 이 인물의 특히 매력적인 점은 ‘아픈 아들을 키우는 어머니’의 역할에 갇히지 않는 것이다. 뺑덕어멈에게는 전신 화상을 입은 어린 아들이 있다. 홀몸으로 아들을 키우지만 그는 방 안에 갇혀 주저앉아 울지도, 아들을 부양하느라 바깥 걸음을 삼가지도 않는다. 최선을 다해 아들을 사랑하고 돌보지만 자신의 주체적인 삶을 포기하지 않는다.
많은 여성이 예로부터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벽의 꽃으로 치부됐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심청전>에서도, 그리고 여성, 주체를 가진 사람으로서 그들의 이야기가 지워진 숱한 동화와 고전의 틈마다 그들이 있음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겁이 많은 동시에 용감했고, 강렬하게 증오하고 열렬하게 사랑했던 그들의 이야기를.
신채윤 <그림을 좋아하고 병이 있어> 저자
*웹툰 소사이어티: 희귀병 다카야스동맥염을 앓는 20대의 작가가 인생의 절반을 봐온 웹툰의 ‘심쿵’ 장면을 추천합니다. 3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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