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튬계열 설 자리 없어진다...차세대 ESS 유망 기업은 [긱스]
리튬 배터리 강자인 중국마저 뛰어든 비리튬계열 차세대 ESS 기업에 뭉칫돈이 몰리고 있습니다. 선제적인 투자와 관련 제도를 정비하는 주요국과 달리 한국은 온도 차를 보입니다. 박인원 인비저닝파트너스 수석심사역이 차세대 ESS 기술기업의 부상을 소개합니다.
인류가 배출하는 전체 온실가스의 73%가량이 ‘에너지'를 생산하고 사용하는 데서 나온다. 제조, 건설, 농업, 수송 등 수많은 산업 분야 내에서도 결국 따져보면 에너지 소비로 인한 탄소배출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전기차를 보급하고, 저탄소 산업 소재를 사용하고, 환경과 건강에 이로운 대체식품을 개발하는 등 모든 영역에서 기후 대응이 본격화되는 추세다. 그러나 그 저변을 떠받치고 있는 에너지 생산 및 소비의 방식을 전환하지 않고서는 탄소중립을 이룰 수 없다. 화석연료에 절대적으로 의존해왔던 에너지 시스템을 지속할 수 있는 에너지 기반으로 옮기는 일이 국가 단위로 주력해야 할 최우선 의제로 꼽히는 이유다.
올해 3월 국가온실가스감축목표(NDC) 수정 로드맵에 따른 탄소중립 녹색성장 기본계획이 발표됐다. 여기에는 신재생에너지 발전 비중을 2021년 7.5%에서 2030년 21.6% 이상으로 3배 가까이 확대하겠다는 계획이 포함됐다. 이는 저탄소 신기술 기반의 에너지 생산이 탄소중립을 위한 선결 과제라는 중요한 현실 인식이 반영된 결과다.
재생에너지 확대, 왜 어려운가?
태양광, 풍력 등을 비롯해 많은 재생에너지 기술이 혁신을 거듭해왔고, 언제나 기대보다 더 빠르게 비용 절감을 이뤄왔다. 그런데도 재생에너지는 간헐성이라는 태생적인 한계가 있다(태양 빛이나 바람이 언제나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이로 인한 출력 제한의 문제는 재생에너지 도입을 주저하게 하는 가장 큰 걸림돌로 작용했다. 결국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재생에너지로 생산한 전기를 저장했다가 필요할 때 꺼내 쓸 수 있게 만드는 에너지저장장치(ESS)의 발전이 담보돼야 한다.
쉽게 말하면 일상에서 충전과 방전을 반복하는 배터리를 전력망이나 발전소에 붙여서 쓸 만큼 거대한 수준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의미다. 그것도 휴대폰, 전기차용 배터리보다 수백 수천 배 큰 용량으로, 훨씬 오랜 시간 출력을 유지할 수 있는, 절대적으로 안전한 ‘발전용 배터리' 기술이 있어야 비로소 재생에너지 활용을 극대화할 수 있다.
실제 산업통상자원부가 지난해 1월 발표한 10차 전력수급기본계획에 따르면, 신재생에너지 확대 보급에 따라 2036년까지 장주기(long duration) ESS가 약 20.85G 규모로 구축돼야 하며, 여기에 최대 39조원이 투입될 전망이다. 지난해 10월 발표된 ESS 산업 발전 전략에서는 10차 전력수급기본계획보다 더 선제적으로 민간투자 촉진과 계통 안전성 보장 차원에서 ESS를 확보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강조한 바 있다.
‘발전용 배터리’의 핵심 요건
1. 장주기(long duration)
재생에너지의 간헐성 문제를 안정적으로 해소하려면 방전시간이 8시간 이상 가능한 ESS가 지금보다 훨씬 많이 보급돼야 한다. 미국에너지부(DOE)는 2020년부터 ‘장주기’를 구분하는 방전시간 기준을 8시간 이상으로 삼았다. 여기에 더해 자국 내 ESS 프로젝트에 대해서는 20년 이상 내구성을 유지할 수 있는 장수명 요건을 요구한다. 이 정도 수준에 도달해야 발전용 ESS로서 경제성이 극대화된다는 분석에서다.
국내에서는 방전시간 4시간 이상이면 장주기로 분류하고 있고, 통상 10~15년 정도의 수명을 기대하고 있는 것과 비교하면 글로벌 ESS 시장에서는 주요 기준 요건이 상향 설정되는 경향을 보인다.
2. 안전성
만약 발전소에 불이 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발생 즉시 재난에 가까운 피해가 따른다. 이 때문에 특정 장소에 거치하는, 발전소 규모로 구현할 대용량 ESS의 기본 요건은 안전성에서 출발해야만 한다.
흔히 일반적인 배터리 기술의 우수성을 판단할 때는 에너지밀도와 경제성을 먼저 거론하지만, 최소한 발전소급의 ESS에서는 안전성을 담보하지 않은 어떠한 성능 요소도 능사가 될 수 없다.
지난 5년간 국내에서 중소형 ESS의 화재 사건이 39건 보고되었는데, 모두 리튬 계열의 ESS로 밝혀졌다. 이는 가연성 유기 전해질을 사용하는 리튬이온배터리의 구조적 특성에 기인한다. 리튬이온배터리는 고밀도, 고효율, 고속 충·방전이 가능한 가장 유용한 배터리지만, 화재위험성이 높다는 점에서 발전용 ESS로서 약점이 존재한다.
3. 균등화 발전비용 경쟁력
발전 사업의 경우 한번 대규모 설비를 구축하고 나면 오랜 기간 이를 운영해야 하는데, 이 때문에 초기 투자 비용뿐만 아니라 유지보수 비용 등을 포함한 총 수명 비용이 중요한 요소로 꼽힌다. 이를 에너지 분야에서는 균등화 발전비용(LCOE)이라고 부르는데, 장주기 ESS의 경제성을 판단할 때 중요한 기준이 된다.
4. 기술적 다양성
‘ESS에서 불이 자주 난다’는 일부 부정적인 인식을 해소할 수 있는 묘안은 결국 모든 ESS를 리튬 계열에 절대적으로 의존해왔던 관성을 깨는 데서 시작한다. 앞으로 증가할 장주기, 대용량 ESS에 대한 요구를 충족하고, 궁극적으로 재생에너지 발전의 시대를 앞당기려면 ESS 내에서 다양한 기술적 접근을 고무할 필요가 있다.
재생에너지 전환과 이를 위한 ESS 투자에 가장 적극적인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경우, 가장 널리 쓰이는 리튬 계열 외에도, 비리튬 기술 계열만 참여할 수 있는 별도의 프로젝트를 열어 의도적으로 다양한 기술 유인에 힘쓰고 있다.
비리튬계 차세대 ESS 기술들
이산화탄소 기반의 장주기 배터리를 개발한 이탈리아의 에너지돔(Energy Dome)은 지난해 4월 경색된 벤처 투자 시장에서도 4000만유로 규모의 시리즈B 투자를 성공적으로 유치했다. 에너지돔의 솔루션은 대용량의 이산화탄소를 압축하고 이를 다시 기화하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발생하는 에너지로 터빈을 돌려 발전하는 원리다. 이산화탄소의 반응성이 빠르고, 방전주기가 8~24시간에 달해 재생에너지의 간헐성에 대응하는 기술로 주목받고 있다. 배터리 효율 성능(round trip efficiency)은 약 75%, 방전 주기 8~24시간, 방심전도(depth of discharge) 100%, 30년 정도의 장수명이라는 장점 때문에 안전성이 높은 장주기 ESS로 관심을 끌었다.
영국 기반의 하이뷰 파워(Highview Power)는 액화 공기 ESS를 생산한다. 이들이 개발한 ‘CRYOBattery’는 잉여 전력으로 공기를 저온에서 압축하여 액체 상태로 보관했다가, 이를 다시 기화시켜 공기의 부피가 팽창하며 발생하는 에너지로 터빈을 돌려 전기를 만드는 방식이다. 공기를 액화하고 다시 기화하는데 필요한 에너지는 LNG 발전의 폐냉(waste cold)이나, 화력발전의 폐열(waste heat)을 사용할 수 있고, 발전 과정에서 온실가스나 부차적인 폐기물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이 최대 장점이다. 기술 계열상 화재 위험성이 없으나 고압 탱크의 안전성 관리가 필요하다. 2021년부터 영국 정부가 추진하는 그레이트맨체스터 주의 친환경 도시 개발 프로젝트에 참여해, 현재 20만 가구에 12시간가량 전기를 공급할 수 있는 용량의 액화 공기 ESS를 2024년까지 공급할 예정으로 알려졌다 .
현재 차세대 장주기 ESS로 주목받는 솔루션은 플로우 배터리(FB)다. 이제 보급 단계로 들어선 기술로, 주로 수계 전해질을 사용하기 때문에 화재위험성이 없고, 전해액의 양만 증대하면 손쉽게 에너지 용량을 늘릴 수 있어 요구되는 방전시간에 맞는 ESS 구현이 가능하다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다.
플로우 배터리 기술 내에서는 바나듐(vanadium)을 전해질로 쓰는 바나듐 플로우 배터리(VFB)가 압도적으로 우세한 양상을 보인다. VFB는 20년 이상의 장수명을 입증한 바 있고, 고유의 화학적 특성상 안전성이 높고 유지보수비용이 상대적으로 낮아 LCOE 관점에서 유리하다.
최근까지 재생에너지 확대 요구와 맞물려 해외 주요 국가에서는 VFB를 전략적으로 육성하려는 시도가 이어져 왔다. 바나듐 자원이 풍부한 호주, 특히 퀸즐랜드(Queensland) 주에서는 2032년까지 총 5.3GW 규모의 장주기 ESS 구축이 필요하다는 판단 아래 바나듐 공급망 전체에 걸쳐 주 정부 차원에서 적극적인 투자를 집행하고 있다.
지난 몇 년 사이 대형 산불과 정전 사태를 경험한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경우 해당 주 공공사업위원회가 앞으로 퇴출할 석탄화력발전소의 대안으로 2026년까지 1GW의 장주기 ESS 구축 계획을 승인했다. 그 안에서도 특히 VFB가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는 전망이다.
중국 역시 자국 내 VFB 기술을 전폭 지원하면서, 상하이 일렉트릭(Shanghai Electric), 롱케전력(Rongke Power), 브이알비 에너지(VRB Energy) 등 내수시장에서 수백 MWh 규모의 실적을 쌓은 기업도 등장했다. 리튬이온배터리의 강국인 동시에 리튬 광물 공급망에서도 세계적인 패권을 쥐고 있는 중국이 비리튬계 기술인 VFB를 정부 차원에서 전폭 지원하는 것은 ESS 기술의 다양성 확보가 어느 정도로 중요한 사안인지 시사한다.
국내에서는 2010년 설립된 에이치투가 자력으로 가장 먼저 VFB를 상용화한 기업이다. 안전하고 경제성 높은 대용량 장주기 ESS 솔루션을 공급하여 단기적으로는 예비력으로 쓰이는 가스발전을 대체하고, 궁극적으로는 재생에너지 보급 확대와 전력계통 안정화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2021년 국내 발전공기업, 연구소 등과 컨소시엄을 맺고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20MWh 규모의 플로우 배터리 ESS 실증 프로젝트를 수행 중이다. 이는 미국 ESS 업계 최대규모로, 내년도 하반기에 캘리포니아 전력계통 내 본격적인 상업 운전을 목표로 한다. 올해 초 시리즈C 투자를 마무리하며 누적 투자유치 570억원 이상을 달성한 바 있다.
이외에도 이른바 ‘금속화 에너지’ 기술로 장주기 ESS를 구현하는 캐나다의 이징크(e-Zinc), 탄소 열광전지(thermophotovoltaic) 방식의 미국의 안토라 에너지(Antora Energy) 등 전 세계 시장에서 다양한 비리튬계 초기 기술 기업들이 등장하고 있으며, 장주기 ESS 솔루션에 대한 요구가 높아지면서 공공과 민간 자본 모두 꾸준히 몰리고 있다.
가능한 솔루션은 얼마나 있나?
미국, 유럽, 중국 등에서 신기술 기반 ESS 육성에 대한 논의가 매우 활발하게 진행되는 것에 비해, 국내의 경우 관련 기술의 토양이 빈약하다. 국내에서 진행되는 대다수의 발전사업 기준이 이미 성숙기를 넘어선 단주기 솔루션에 지나치게 의존해왔기 때문에, 장주기에 적합한 다양한 기술을 충분히 유인하지 못한 탓도 있다.
연구개발과 스케일업 단계에서 큰 비용이 소요되는 ESS 신기술은 여타 하드웨어 테크와 마찬가지로 초기에 경제성을 입증하기 어렵다. 당장의 가격 경쟁력으로만 기술을 채택하면 잠재력이 큰 혁신 기술이 시장으로 나올 수 있는 문이 더욱 좁아진다. 소규모라도 장기 용량, 장기 계약의 구조를 보장하거나, 신재생에너지공급인증서(REC) 가중치 등을 주는 방식으로 실증 기회를 넓혀줄 방법을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
경쟁력을 갖춘 국내 ESS 솔루션을 육성하는 일은 비단 국내 재생에너지 전환을 가속하는 전략일 뿐만 아니라 글로벌 차원의 에너지 탄소중립을 견인하는 일도 된다. 전체 탄소배출의 73%를 차지하는 에너지 분야에서 탈탄소 전환의 주축이 될 기술을 갖는다는 것은 글로벌 탄소중립 이행의 리더십을 갖는다는 의미와 다르지 않다.
한 스타트업 대표는 최근 기후테크 육성을 위해 마련된 국내 정책 세미나에서, 독일은 2035년까지 100% 재생에너지 발전으로 전환하겠다고 공표했고 이를 위한 공격적인 정책을 추구하고 있다는 점을 상기했다. 그는 이 계획대로 이루어진다면 독일의 미래세대는 대략 10년 뒤부터는 지속할 수 있는 에너지 위에서 구동되는 새로운 경제 기반을 갖게 될 것이며, 한국의 미래세대와는 완연히 다른 경쟁 우위를 확보할 것이라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박인원 인비저닝파트너스 수석심사역 ㅣ전산학을 전공한 변호사/변리사로, 지식재산권과 영업비밀 분야의 전문성을 보유하고 있다. 인비저닝 파트너스에 합류하기 직전 옐로우독 심사역으로 재직했고, 로펌과 특허법인, 벤처캐피털을 두루 경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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