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 오늘] "나는 흑인·여성의 대선 후보가 아니다"

최윤필 2024. 1. 25. 0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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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령 기아나와 바베이도스 이민자 부부의 장녀로 뉴욕 브루클린에서 태어난 치점은 가난 탓에 유년기 약 5년을 바베이도스 외가에서 보냈고, 10세 때 돌아와 브루클린 칼리지(사회학)와 컬럼비아대 대학원(아동교육)을 졸업했다.

그의 바람대로 미국 시민들은 흑인 여성 대선 후보와 조금이나마 친숙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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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 셜리 치점
1972년 미국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 출마한 셜리 치점의 선거 포스터. 그는 미국 주요 정당 최초 흑인, 최초 여성 대선후보다. mcny.org

미국 최초 흑인 여성 연방하원의원 셜리 치점(Shirley Chisholm, 1924~2005)이 1972년 1월 25일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 출마를 선언했다. 팻시 밍크가 출마했던 바로 그 선거였지만, 밍크보다 앞서 선언한 덕에 그는 주요 정당의 첫 여성, 첫 흑인 대선 후보가 된 거였다. 치점은 14명 후보 중 7위(밍크는 13위)를 기록했다.

영국령 기아나와 바베이도스 이민자 부부의 장녀로 뉴욕 브루클린에서 태어난 치점은 가난 탓에 유년기 약 5년을 바베이도스 외가에서 보냈고, 10세 때 돌아와 브루클린 칼리지(사회학)와 컬럼비아대 대학원(아동교육)을 졸업했다. 그는 고교 시절부터 웅변과 토론에 능해 여러 대회에서 수상했다. 보육원 교사와 뉴욕시 아동복지국 교육 컨설턴트 등으로 일한 뒤 1953년 정치에 입문, 64년 뉴욕 주의원, 68년 연방 하원의원이 됐다. 그는 1983년 은퇴할 때까지 7차례 연임하며 흑인 및 여성, 이민자 인권과 빈곤층 복지를 위해 헌신했고 베트남전쟁에 줄기차게 반대했다. 그는 탁월한 연설가였고, 스스로도 밝힌 바 그의 최대 무기는 ‘입(연설)’이었다.

그리고 핵심 정치 철학은 관용과 포용이었다. 그는 포용이야말로 이민자의 나라인 미국이 위대해진 이유이자 위대해질 수 있는 힘이라며, 정치-경제-사회적 불의에 맞서 소수자 권익을 옹호했다. 1973년 저서 ‘좋은 싸움(Good Fight)’에 밝힌 것처럼 그가 조직도 자금도 준비도 부족한 상황에서 대선 출마를 선언한 까닭도 대통령이 되려던 게 아니라 “무엇이 중요한지 일깨우기 위해서”, 즉 흑인도, 여성도 대통령 후보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그의 바람대로 미국 시민들은 흑인 여성 대선 후보와 조금이나마 친숙해졌다.

36년 뒤인 2008년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은 흑인 후보 버락 오바마와 여성 후보 힐러리 클린턴의 2파전으로 치러졌다.

최윤필 기자 proos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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