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포커스] 은행 돈잔치는 勞使政의 합작품이다

나지홍 기자 2024. 1. 25.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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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치금융이 만든 과점체제서 은행 연봉 10년 새 거의 2배
고임금 혜택 누린 금융노조가 고금리 고통 분담 앞장서야
전국금융산업노조 소속 조합원들이 2022년 9월 임금 6.1% 인상, 정년 연장 등을 요구하며 총파업 결의대회를 열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2022.9.16/뉴스1

“노동자들 간의 소득 격차를 해소하기 위해 고임금 노동자들의 임금 인상을 자제해야 한다. 저임금 노동자들은 대체 누가 책임지냐는 이야기다. 노동계는 아무 책임 없이 금융노조처럼 연봉 1억, 2억씩 계속 가도 되는 것인가.”

고액 연봉을 받는 금융노조의 임금 동결을 촉구한 이 발언은 최근 나온 게 아니다. 20년 전인 2004년 일이다. 발언을 한 당사자는 경영진이나 관료가 아니라, 양대 노총 중 하나인 한국노총의 이용득 위원장이었다.

이 위원장은 상업은행(현 우리은행) 노조위원장 출신으로 금융노조 위원장을 거쳐 한국노총 위원장으로 선출된 ‘노동계 거물’이었다. 그는 금융노조 위원장이던 2004년 초 본지 인터뷰에서 “청년 실업 해소와 비정규직 처우 개선을 위해 노조가 임금을 양보하는 대신, 사용자 측은 신규 채용을 늘리자”며 노사 간 대타협을 제안했다. 외환 위기 이후 기업들이 비용 절감을 위해 신규·정규직 채용을 기피하면서 ‘청년실업’과 ‘비정규직 증가’가 큰 사회적 문제로 떠올랐을 때다.

노조가 자선사업가도 아닌데 선심 쓰듯 임금 동결을 제안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경제적 이익을 일부 희생하더라도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장기적으로 노조의 위상을 높이려는 전략적 판단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20년 전 얘기를 꺼낸 것은 경기 침체와 고금리로 서민들의 생활이 어려워지는데도, 고액 연봉을 받는 은행원들이 고통 분담에 나서지 않기 때문이다. ‘빅3′인 국민·신한·하나은행의 1인당 평균급여(2022년 기준)는 각각 1억1600만원, 1억1300만원, 1억1700만원으로 비슷하다. 2010년 국민과 신한의 평균 연봉이 5600만원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12년 만에 107%, 102% 급증했다. 같은 기간 국내 대표 기업인 삼성전자 연봉 상승률(56%)의 2배에 육박한다.

그래픽=이철원

그동안 은행들이 삼성전자처럼 글로벌 경쟁 기업들을 압도하는 거창한 혁신을 한 것은 아니다. 한 국책은행장은 “국내 은행업의 본질은 부동산”이라고 했다. 주택 담보 대출이 대부분인 가계 대출은 물론, 기업 대출도 토지와 건물 같은 담보가 없으면 대출해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국내 은행들이 돈 떼일 염려 없이 담보 잡아 대출해주면서 이자 장사로 돈을 버는 ‘땅 짚고 헤엄치기’식 영업을 하고 있다는 소리다.

부동산 가격 상승 덕에 은행 대출은 2007년 989조원에서 2022년 2541조원으로 15년간 157% 급증했다. 반면 순이익은 같은 기간 15조원에서 18조6000억원으로 24% 상승하는 데 그쳤다. 자산이 늘어난 만큼 수익성이 따라가지 못한 것이다. 국내 5대 은행의 2022년 총자산이익률(ROA)은 0.52%였다. 은행 자산 1000원을 굴려 5.2원의 이익을 냈다는 뜻이다. 미국 은행은 이 비율이 1.12%로 우리나라의 2배를 넘었다.

낮은 수익성에도 은행원들 연봉이 크게 오른 것은 역설적으로 정부의 규제 때문이다. 금융 당국이 신규 은행 진입을 제한하면서 대형 은행들의 나눠 먹기식 과점 체제가 고착화된 것이다. 미국에는 4100개 이상의 상업은행이 있고, 영국에는 353개, 독일에는 261개가 있다. 20개 남짓인 한국과 큰 차이가 난다.

대주주가 없는 은행에서 노조는 경영진이 눈치 봐야 하는 막강한 세력으로 자리 잡았다. 장관 출신인 임종룡 우리금융 회장의 첫 공식 일정이 노조 방문이었을 정도다. 이용득 위원장은 임금 동결을 주장하면서 “내 몫을 아끼자고 하면 조합원들이 유쾌하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라며 “노조 지도부가 지도력을 갖고 조합원들을 설득해 나가야 한다”고 했다. 관치 금융이 만든 과점 체제에서 혜택을 누린 금융노조가 귀담아들어야 할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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