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서 사랑, 죽음서 만남으로… 이 무대 위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이태훈 기자 2024. 1. 25.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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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흐름을 소재로 한 뮤지컬 3편
거꾸로 흐르는 시간 속에 엇갈리기만 하던 ‘캐시’(민경아·왼쪽)와 ‘제이미’(이충주)가 처음 마주 보는 청혼과 결혼식의 순간, 무대 위로 꽃비가 내린다. 뮤지컬 ‘라스트 파이브 이어스’. /신시컴퍼니

여자의 시간은 이별에서 시작해 첫 만남으로, 남자의 시간은 첫 만남으로부터 이별을 향해 흐른다.

지난 19일 개막한 뮤지컬 ‘라스트 파이브 이어스’의 무대 위에서 사랑이 시작되고 끝나는 5년 동안 주인공 ‘제이미’(최재림·이충주)와 ‘캐시’(민경아·박지연)는 줄곧 함께 있는 듯하지만 실은 늘 비켜 서 있다. 상대를 부르고 말을 걸어도 닿을 수 없는 서로 다른 시간대 속에 있기 때문이다. 한때 세상 무엇보다 찬란했던 연애의 시작이 멀어져 버린 사랑의 끝과 아찔한 정서적 낙차로 엇갈린다. 끝이 정해진 사랑을 지켜보는 관객의 마음도 무대 위 남녀의 아픔에 함께 공명한다.

독특한 시간의 흐름을 스토리텔링의 주요 요소로 적극 활용하는 뮤지컬들이 관객의 사랑을 받고 있다. 뉴욕타임스가 ‘견딜 수 없이 현기증 나고 위험하게 맥박이 뛴다’고 극찬했던 뮤지컬 ‘라스트 파이브 이어스’는 가장 최근 사례다. 올해 제8회 한국 뮤지컬 어워즈에서 작품상(400석 미만)·극본상·작곡상 3관왕을 차지하며 파란을 일으킨 소극장 뮤지컬 ‘라흐 헤스트’, 작년 제7회 어워즈에서 작품상·음악상·남자신인상을 받은 ‘렛미플라이’도 마찬가지다. 타임머신이나 마법 지팡이는 없다. 그럼에도 역행하는 시간은 이야기의 중요한 반전 장치이자, 관객의 감동을 탄탄히 쌓아 올리는 도구가 된다.

‘라스트 파이브 이어스’의 캐시는 배우가 되려 뉴욕으로 왔지만 지지부진한 커리어에 조바심을 낸다. 그와 사랑에 빠진 제이미는 첫 소설부터 ‘미래의 노벨상 작가’ 소릴 듣는 잘나가는 소설가. 캐시가 연인을 잃은 아픔을 노래할 때 제이미는 막 시작한 사랑에 들뜬 채 무대 한쪽에 서 있고, 제이미가 결국 사랑을 지키지 못했다며 슬퍼할 때 캐시는 행복한 얼굴로 언제까지라도 당신을 기다릴 거라고 노래한다. 이뤄지지 못한 모든 사랑이 그렇듯, 이 연인은 가장 아름다웠던 청혼과 결혼식의 순간을 제외하면 끝내 같은 곳을 바라보지 못한다.

두 겹 회전무대 위 탁자는 무대의 움직임을 따라 조금씩 어긋나거나 길게 늘어서며 그 자체로 두 연인의 심리상태를 드러내는 장치가 된다. 제이미(최재림)와 캐시(박지연)가 긴 탁자의 양끝에 앉을 때, 무대는 어떻게 해도 좁혀지지 않는 둘 사이의 거리를 아프도록 물리적으로 표현한다. /신시컴퍼니

한 번 들으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노래들, 우리 창작진이 만들어낸 두 겹의 회전 무대(더블 턴테이블)가 이 엇갈리는 시간을 가능하게 한다. 회전 무대의 움직임에 따라 조금씩 어긋나게 배치되는 무대 위 긴 탁자는 그 자체로 두 연인의 마음을 드러내는 장치. 한 줄로 맞춰 길게 늘어선 탁자 위는 결혼식 행진을 위한 융단이 되고, 그 양 끝에 남녀가 떨어져 앉으면 어떻게 해도 좁힐 수 없도록 벌어진 마음의 거리가 아프도록 물리적으로 표현된다. ‘아이다’ ‘마틸다’ 등 대작 뮤지컬을 거친 이지영 연출가와 손석구 주연 ‘나무 위의 군대’, 박근형 주연의 ‘세일즈맨의 죽음’, 서울시뮤지컬단의 ‘알로하, 나의 엄마들’ 등에서 인상적 무대를 만들었던 최영은 무대감독이 빚어낸 작품이다. 공연은 서울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에서 4월 7일까지.

작가 이상, 화가 김환기의 아내였던 김향안의 이야기 ‘라흐 헤스트’(위 사진). 서사에서 독특한 시간의 흐름은 핵심 요소다. /홍컴퍼니

뮤지컬 ‘라흐 헤스트’에서도 두 개의 시간대가 엇갈려 흐른다. 작가 이상(李箱)과 화가 김환기, 두 천재의 아내였던 김향안(1916~2004)의 이야기. 본명이 변동림이었던 그는 남편 이상과 사별한 뒤 화가 김환기를 만나 재혼하면서 김환기의 필명 ‘향안’을 받아 김향안으로 개명했다. 뮤지컬 속 당찬 신여성 변동림의 시간은 처음 이상을 만난 1936년에서 남편과의 이별을 향해 순방향으로, 김향안의 시간은 마지막 눈을 감는 2004년으로부터 김환기와의 만남을 향해 역방향으로 흐른다. 두 이름을 가졌던 한 여성을 각각 다른 배우가 맡아 연기하는 동안, 관객은 극의 마지막에야 인생의 고비마다 보이지 않게 서로를 지켜보며 힘이 되어준 두 사람이 실은 한 여성이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마법처럼 아름다운 뮤지컬이다. 제목 ‘라흐 헤스트(L’art reste)’는 프랑스어로 ‘예술은 남는다’라는 뜻으로, 김향안이 남긴 ‘사람은 가고 예술은 남다’라는 말에서 따왔다.

1969년의 재단사 청년이 2020년의 미래로 가는 이야기 ‘렛미플라이’. 서사에서 독특한 시간의 흐름은 핵심 요소다. /프로스랩

오는 26~27일 울산에서 지방 순회 공연을 하는 뮤지컬 ‘렛미플라이’에서도 시간은 서사의 가장 중요한 요소다. 인류가 달에 발을 디딘 1969년, 서울로 가서 패션 공부를 하고 싶어 하는 재단사 청년이 2020년의 미래에 갑자기 떨어진다. 실은 시간 여행이 아니라 기억을 잃은 것뿐임을 숨긴 채, 뮤지컬은 천연덕스럽게 옛 연인과 지금의 노부부를 교차시키며 설레었던 첫사랑으로부터 평생을 함께해온 노년의 끝사랑으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3월엔 대만 라이선스 공연도 예정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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