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이철희]‘남조선’이 사라졌다

이철희 논설위원 2024. 1. 24. 2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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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북한 대외매체의 보도에서 '남조선'은 찾아볼 수 없다.

그래서 경멸과 조롱의 의미를 담기 위해 대한민국 뒤엔 늘 '족속들' '것들' '놈들'을 붙였고, '외세의 특등주구인' 같은 수식어도 필요했다.

그것은 김여정의 수령을 향한 끊임없는 인정투쟁, 그리고 그가 이끄는 선전선동팀의 대내 사상투쟁 끝에 나온 결과일 가능성이 크다.

그 결과가 체제경쟁의 실패를 자인하는 수세적 노선으로의 전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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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 대남 호칭 변경, 김여정의 인정투쟁 결과?
체제경쟁 패배 자인한 얼치기의 자충수일 뿐
이철희 논설위원
요즘 북한 대외매체의 보도에서 ‘남조선’은 찾아볼 수 없다. 그 자리에 ‘대한민국’이 들어섰다. 김정은이 작년 세밑 노동당 전원회의에서 “북남관계는 더 이상 동족관계가 아닌 적대적 두 국가 관계, 전쟁 중 두 교전국 관계”라고 규정하고 ‘대남 노선의 근본적 방향 전환’을 천명한 직후부터다. 이때까지만 해도 김정은은 남조선을 주로 썼고 대한민국을 언급한 것은 한두 차례뿐이었다. 하지만 새해 들어서자마자 모든 매체에서 남조선이 싹 지워졌다.

그 시작은 6개월 전이었다. 김여정이 작년 7월 미군 정찰기의 북한 EEZ 상공 비행을 비난하는 담화에서 난데없이 남측을 겹화살괄호(≪ ≫)에 씌워 대한민국이라 부르면서다. 당시만 해도 대한민국은 김여정 명의의 담화에만 등장했고, 편의에 따라 남조선을 섞어 쓰기도 했다. 이후 서서히 시동이 걸리듯 대한민국이 하나둘씩 남조선을 대체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건 단어 하나 바꾸는 문제가 아니었다. 금기어였던 대한민국을 사용하는 것은 당장 거부감을 피할 수 없다. 더욱이 주민들이 받아들일 정서적 혼란은 더 큰 문제였다. 그래서 경멸과 조롱의 의미를 담기 위해 대한민국 뒤엔 늘 ‘족속들’ ‘것들’ ‘놈들’을 붙였고, ‘외세의 특등주구인’ 같은 수식어도 필요했다. 작년 10월 아시안게임 남북 축구경기 중계에선 차마 대한민국을 쓰기 어려웠는지 ‘조선 대 괴뢰’로 표기하기도 했다.

일단 시작하면 적당히 끝낼 수도 없다. 내처 김정은은 연초 최고인민회의 연설을 통해 헌법에서 ‘자주·평화통일·민족대단결’ 표현을 삭제하고, 역사에서 통일·화해·동족 개념도 완전히 제거할 것을 지시했다. 머지않아 노동당 규약에 있는 ‘남조선’ ‘평화통일’도 걷어낼 것이다. 할아버지 아버지가 만든 남북관계의 틀을 완전히 부정하며 법과 규범, 주민의식까지 뜯어고치는 이데올로기 상부구조의 전면 개편에 들어간 것이다.

그것은 김여정의 수령을 향한 끊임없는 인정투쟁, 그리고 그가 이끄는 선전선동팀의 대내 사상투쟁 끝에 나온 결과일 가능성이 크다. 2019년 하노이 북-미 회담 결렬의 굴욕을 겪은 뒤 남북관계를 파탄으로 이끌며 온갖 험구로 대남 분풀이의 선봉에 섰던 김여정이다. 이젠 정권의 이데올로그 역할까지 자임하며 오빠를 설득해 추인까지 받아낸 것이다.

때마침 러시아와 위험한 거래를 성사시킨 뒤 대남 긴장 수위를 더욱 올릴 필요가 있다는 김정은의 계산과 맞아떨어졌을 수 있다. 40년의 냉전, 30년의 탈냉전을 거치며 도발과 좌절, 도전과 시련의 세월을 겪은 북한으로선 격화되는 신냉전 기류에 재빨리 올라타 호기를 잡았다고 여기는 터다. 연말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 복귀를 기다리면서 호전성을 과시해 존재감을 드러내겠다는 속셈도 작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시도는 결국 자충수가 될 수밖에 없다. 얼치기 이데올로그는 당장 눈앞의 편리를 위해 현실을 무시한 논리적 비약의 늪에 빠져든다. 그 결과가 체제경쟁의 실패를 자인하는 수세적 노선으로의 전환이었다. 결국 독재체제 유지와 김씨 세습정권 보존이 유일한 목표인 북한의 군색한 현실을 그대로 노출한 것이다.

북한의 행보는 옛 동독의 ‘2민족 2국가’ 노선과 판박이다. 1970년대 에리히 호네커 정권은 ‘독일 단일민족론’을 부정하며 헌법 개정을 통해 ‘독일 민족’을 지우고 분단 극복과 통일 노력 조항까지 삭제했다. 통일을 염원하는 가사가 거슬린다며 국가(國歌) 제창조차 못 하도록 했다. 그렇게 독자적 정권임을 과시했다지만 결국엔 서독에 흡수되고 말았다. 김씨 남매의 무지한 대담성이 불러올 파장이 우려스러울 뿐이다.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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