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칼럼] ‘길위에 김대중’
“피고 손호철 5년!” “재판장님, 손호철 피고인은 미성년자입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 출생 100년을 맞아 상영 중인 <길위에 김대중>에서 1971년 대선 장충단공원 연설장면을 보고 있자 떠오른 것이 대선 직후 있었던 재판이었다. 박정희와 김대중이 대결한 1971년 대선은 1987년 6월항쟁에 의해 민주화를 쟁취할 때까지 치러진 선거 중 국민들이 대통령을 직접 뽑은 마지막 선거였다. 이 선거에서 나는 많은 대학생들과 부정선거를 감시하기 위한 선거참관인단을 조직해 참여했다. 수많은 부정선거를 직접 목격한 나는 다른 대표들과 신민당을 방문해 부정선거를 고발하기 위해 국회의원선거를 거부하라고 요구했다. 박정희 정권은 우리가 선거와 정당활동을 방해했다며 구속기소했고 모두에게 5년을 구형했다. 당시 나는 대학 2학년이었지만 학교를 일찍 들어가 만 18세에 불과해 ‘소년범’이었는데 검찰이 이를 모르고 다른 학생들과 똑같이 구형을 했다가 재판장에서 엄청 혼이 났던 기억이 생생하다.
<길위에 김대중>은 김 전 대통령의 출생부터, 해방정국, 1950년대의 정치 입문과 연이은 낙선, 국회 진출 후 소장정치인으로 활약한 1960년대를 거쳐 그를 전국적인 정치인과 민주투사로 만든 1971년 대선, 유신에 저항해 해외에서 민주화운동을 하다 일본에서 박 정권에 납치되어 온 납치사건, 오랜 가택연금과 1979년 박정희 암살에 의한 짧은 해빙, 신군부의 쿠데타와 비극적인 5·18 학살, 전두환에 의한 사형선고와 수감생활, 미국 등의 압력에 의한 보석과 미국망명생활, 1985년 총선을 앞두고 단행한 귀국과 직선제 개헌투쟁 등 1987년까지의 파란만장했던 김 전 대통령의 삶과 격동의 한국현대사를 희귀한 동영상과 자료들을 동원해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1987년 이전을 경험한 세대들은 역사를 돌아보고 반추하는 ‘추억의 영화’다. 이 영화를 꼭 봐야 하는 것은 민주화 이전의 암울한 정치상황을 모르는 젊은 세대들이다.
‘옥에 티’로 아쉬운 것은 ‘고증’의 문제이다. 이 영화가 다큐멘터리인 만큼 사실에 기초하는 것이 중요한데 김대중 납치사건의 경우 문제가 많다. 영화는 박정희 정권이 김대중을 살해하려다가 목격자가 나타나 실패했고 중앙정보부 공작선 용금호에 납치한 뒤에도 그를 수장시키려 하다가 미국과 일본의 추적으로 포기했다는, 세간에 알려진 이야기를 재현해 보여주고 있다.
이 사건에 대해서는 노무현 정부가 각 분야 전문가들로 조직한 국정원과거사건진실구명을통한발전위원회(발전위)에서 여러 해에 걸쳐 광범위한 조사를 벌인바, 영화 속의 이야기는 사실과 거리가 멀다. 나 역시 이 위원회에 학계대표로 참여해서 조사를 한 바 있다.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김 전 대통령을 납치해 오면서 수장하려 했다는 부분이다. 그러나 용금호 선원만이 아니라 김대중 전 대통령까지도 발전위와의 면담에서 “직접적으로 수장을 시도하는 행위는 없었다”(국가정보원, <과거와 대화, 미래의 성찰: 주요의혹사건편 상(II)> 507쪽)고 밝혔다. 살해 시도도 초기단계에는 여러 계획 중 하나로 검토했지만 실행단계에는 단순 납치 계획이었고 미국·일본의 추적설도 조사결과 사실이 아닌 것으로 나타났다.
살해 및 수장 시도 등이 아니더라도 박 정권이 국제법을 어기고 김 전 대통령을 납치해 왔다는 사실, 나아가 ‘치열한 민주투사로서 김대중의 1987년까지의 삶’에 흠집이 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위의 ‘사실 왜곡’은 김 전 대통령의 삶과 영화에 대해 의문을 갖게 하는 부작용이 있다. 이외에도 김 전 대통령에 부당하게 따라다니는 ‘급진이미지’를 의식해서인지 김 전 대통령이 ‘온건하고 합리적’이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해방정국에서의 그의 건준 경력을 빼버리고 대표적인 굴욕적 협정으로 5·16 쿠데타의 간접적 배경이 된 것으로 지적되는 장면 정권의 한·미경제조정협정 개정과 박정희의 한·일국교정상화에 대한 학생과 야당 등의 반대를 ‘막무가내식 반대’로 비판한 것은 논쟁의 여지가 많다.
이 영화가 특히 의미 있는 것은 현 상황 때문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을 이어받은 더불어민주당은 촛불항쟁 덕분으로 집권했지만 오만과 탐욕, 내로남불 등으로 촛불에 의해 탄핵을 당한 보수세력에 정권을 내줬고, 집권한 윤석열 정권은 역사의 시계바퀴를 뒤로 돌리고 있다. 하지만 이재명 대표가 이끄는 더불어민주당은 도덕적 타락과 팬덤정치 등으로 그 대안으로 지지를 받고 있지 못하다. <길위에 김대중>은 정치권에 정치가 가야 할 길을 가리키고 있다.
손호철 서강대 명예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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