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아영의 레인보 Rainbow] 희망은 한 걸음씩 나아가는 사람들에게 있다

임아영 기자 2024. 1. 24.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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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가 지난 10일 표준국어대사전에 올랐다. 젠더데스크로 일한 지 1년5개월여, 표준국어대사전에 없던 단어를 직책 이름으로 두고 일했던 셈이다. 국립국어원은 “성과 관련된 개념의 균형을 고려했다”고 했다. 기존에는 생물학적 의미의 성을 뜻하는 ‘섹스’만 사전에 올라가 있었다. 젠더는 생물학적 성별에 따라 사회가 규정짓는 특성, ‘사회적 성’이라고 할 수 있다. 여성이라 해서 모두 같진 않지만 ‘여성스럽다’는 특성은 여성을 규정짓고 나아가 옥죈다. 남성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젠더 관점에서 보면 고정된 성별 관념이나 역할이란 있을 수 없다.

한국은 이제야 ‘젠더’를 등재하는 사회다. 서구에서는 이미 1970~1980년대 섹스와 젠더를 구분하는 논의에도 비판이 있었다. 후기구조주의 페미니스트들은 이런 구분에도 의문을 제기한다. 주디스 버틀러 미국 UC버클리대 교수는 젠더를 ‘수행(performance)’으로 본다. 생물학과 문화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우리는 생물학적 성별에 의해서도, 사회적 성역할에 의해서도 결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가 강조하는 것은 성별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주체다.

역사가 다른 미국·유럽의 상황과 한국을 비교하는 것은 난센스다. 아버지와 함께 살면서 1952년 한국전쟁이 한창일 때 태어난 아버지와 2010년대에 태어난 내 아이들의 세상이 얼마나 다른지 실감한다. 전쟁을 했고 그를 극복했고 경제성장과 민주화를 동시에 이루는 일을 한국은 수십년 만에 해냈다. 갈등은 어쩌면 필연적이다. 성별임금격차를 연구해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클로디아 골딘 미국 하버드대 교수가 정확하게 봤다. 골딘은 한국의 저출생 현상에 대해 질문받자 이렇게 말했다. “20세기 후반 한국보다 더 빠른 경제적 변화를 겪은 나라는 거의 없다. 빠른 변화는 갈등을 야기한다. 한국은 단기간 급격한 변화를 겪으며 적응할 능력을 갖추지 못했다.” 급속한 경제성장으로 여성의 사회 진출이 증가했지만 사회 제도, 문화가 이를 따라잡지 못했고 저출생 문제가 심화됐다는 뜻이다.

급격한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문화지체 현상’은 여기저기서 나타난다. ‘집게손 사태’ 이후 침묵하고 있는 게임회사 넥슨도 해외에선 이런 태도를 보일 수 없을 것이다. 안티 페미니즘을 연구해온 사회학자 최태섭은 최근 세계일보 인터뷰에서 북미·유럽 게임시장에서도 남성 소비자들을 중심으로 집단적 괴롭힘이 있었지만 적어도 업계 차원에서 부당한 요구에 굴복하진 않았다고 말했다. 여성, 유색인종, 성소수자까지 소비자로 받아들여 리스크 관리를 하려 하기 때문이다. 반면 한국에선 성차별을 용인하는 것이 더 유리하다고 판단한다. 현대차도 미국 앨라배마 공장에서는 여성을 36% 고용했지만 한국 공장에서는 한 번도 생산직 여성을 선발한 적이 없었다. 현대차는 지난해 초 처음으로 6명을 채용했는데 하반기 공채에서는 또 여성을 뽑지 않았다. 미국에선 안 되지만 한국에선 그래도 되기 때문이다.

경제는 선진국 덩치가 됐지만 사회·문화는 그를 따라가지 못하고 그만큼 세대 간 인식 격차가 큰 사회에서 갈등을 조정해야 할 정치권은 더 무거운 짐을 져야 한다. 하지만 총선 논의는 빅텐트를 치느냐 마느냐, 대통령과 여당 비대위원장 중 누가 힘이 센지뿐이다. 국회의 대표성 확대 얘기는 꺼낼 틈이 없다. 온통 남성뿐인 정치권 논의를 지켜보면 공직선거법의 ‘지역구 여성 후보 공천 30% 노력’ 조항은 다른 나라 얘기다. 요즘 보이는 여성은 ‘권력자 김건희’뿐 아닐까 싶어 더 힘이 빠진다.

그렇다고 포기할 순 없다. 경향신문 여성 서사 아카이브 채널 ‘플랫’은 지난해 12월 ‘입주자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플랫 독자(입주자)들과 기자들이 만나서 함께할 수 있는 일을 모색하는 프로젝트다. 첫 번째로 김준영 그림책 작가의 ‘엄마 성 빛내기’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아이에게 엄마 성을 물려주고 싶었던 김 작가는 혼인신고 때 구청 직원 실수로 모성을 물려줄 수 없게 됐다. 부성우선주의를 거부하는 자신을 주변에서 유난스러운 사람으로 대하자 김 작가는 자신 먼저 엄마 성을 쓰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한 달간 엄마 성으로 성·본 변경을 원하는 이들의 신청을 받았다. 최종 신청자는 171명으로 집계됐다. 신청자가 늘자 자문 의견을 주겠다는 변호사도 5명으로 늘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신청할지, 지지할지 예상 못했다. 정치가 담지 못할 뿐 시민들의 생각은 한 발 더 나아가고 있다. 희망의 증거를 발견한 기분이다. 한 걸음씩 나아가며 길을 만드는 사람들을 차분하게 기록하려 한다.

임아영 젠더데스크·플랫팀장

임아영 젠더데스크·플랫팀장 layknt@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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