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표의 과학 한 귀퉁이] 자작나무의 신비한 ‘겨울나기 전략’
하늘로 올라간 무게 있는 것들은 으레 아래로 내려오게 마련이다. 바닷물, 강물도 마찬가지라서 지난날 대기로 올라간 수증기가 올겨울 자주 눈으로 비로 찾아온다. 겨울 평균 기온은 올랐다지만 오히려 추운 날은 더 춥다. 삼한사온은 가뭇없이 사라지고 기후를 예측하기는 어려워졌다. 반짝 기온이 올라 개나리꽃이 피었대도 겨울잠 자는 동물들이 성급하게 기지개를 켜면 안 된다. 야생 동물은 촘촘한 털 매무새를 추스르며 추위를 버티지만 밑동에 켜켜이 눈 쌓인 나무들은 어떻게 겨울을 나는 것일까?
평안북도 출신 백석은 ‘그 맛있는 메밀국수를 삶는 장작도 자작나무’라며 백화라는 제목의 시를 썼다. 나도 몇년 전 백두산 가는 길목에서 아름드리 자작나무숲을 본 적이 있다. 아랫도리 날씬한 미인송 숲을 지나서였다. 허옇고 종잇장처럼 얇은 껍질을 두른 자작나무는 아름다운 겨울나무다. 북극의 백곰처럼 추위에 잘 적응한 식물인 것이다. 가을이 깊어가고 날이 짧아지면 식물은 광합성 장치의 가동을 멈춘다. 탄수화물을 저장소로 보내는 일도 서둘러야 하지만 뿌리 쪽으로 물을 끌어내려야 갈무리가 끝난다. 가장 좋은 방법은 잎을 떨구는 것이다. 씨앗을 땅에 흩뿌리는 일년생 풀들은 씨에 휴면기를 두는 방식으로 겨울을 나지만 나무는 통째로 서서 겨울을 산다.
대나무처럼 북방한계가 뚜렷한 식물이 있는 걸 보면 종마다 추위 막는 전략이 다름은 이치에 맞지만 대개 나무는 세 가지 방식으로 겨울을 버틴다. 첫 번째는 세포 밖으로 물을 빼내는 한편 탄수화물을 분해하여 포도당의 양을 늘리는 일이다.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면 나무는 세포 밖에서 잽싸게 얼음을 얼리기 시작한다. 그러면 농도 기울기가 생겨 세포 안의 물이 더 쉽게 밖으로 나오게 되고 부동액 역할을 맡는 세포 안 포도당은 날카로운 얼음 결정이 생기지 못하게 막는다. 이런 전략은 숲에서 겨울을 나는 숲개구리(wood frog)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겨울에 접어들면 이 개구리는 피부와 근육 사이로 혈액의 물을 꺼내 얼리고 간에 저장된 글리코겐을 깨 포도당을 만들어 중요한 기관에 나눠준다. 그야말로 나무 속이나 개구리 몸 안에 이글루를 세우는 방식이다. 결빙 방지 단백질을 진화시킨 생명체도 훌륭한 추위 방지 전략을 갖춘 존재들이다.
둘째는 계절적 수명 주기를 조정하는 일이다. 눈에 확연하게 띄진 않지만 이런 전략은 봄철에 활동을 개시하고 늦가을에 접어 식물 성장기를 제어한다. 겨울은 봄 여름 가을 내내 준비하는 것이다. 자작나무는 이른 봄 잎을 틔워 시나브로 광합성을 시작하고 꽃도 서둘러 피운다. 채 1년 지나지 않은 어린나무가 씨를 맺는 일도 곧잘 해낸다. 또 자작나무는 부쩍부쩍 자란다. 매미 탈바꿈하듯이 자작나무도 크느라 껍질을 자주 벗는다. 생물학자들은 빙하기가 끝나고 물러가는 빙상을 쫓아 자작나무가 북으로 세력을 넓혔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사실 자작나무와 버드나무는 ‘개척자’ 식물이라는 별명을 가졌다. 산불이 났거나 개간을 한다고 벌목한 빈 땅에 가장 먼저 뿌리를 내리기 때문이다. 이렇듯 자작나무는 시간의 오고 감과 공간의 열린 틈을 여간해서는 놓치지 않는다.
추위를 버티는 세 번째 진화적 적응은 식물 크기를 줄이는 일이다. 미인송과 자작나무 숲을 지나 백두산 정상 가까이 갈수록 관목이 대세인 것을 보면 식물의 이런 적응은 직관적으로 이해가 간다. 웅크리고 모여 있어야 산꼭대기 나무 주변으로 온기가 덜 새나가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반도에 서식하는 자작나무는 생태학적으로 높은 산의 밤 추위보다 위도가 높은 지역의 겨울 추위에 적응했다고 결론을 내려야 할 것 같다. 하지만 툰드라 지역에 서식하는 자작나무는 관목이다.
추위에 적응하고자 식물이 개발한 전략은 제법 그럴싸하다. 그러나 자작나무는 그 이상의 일을 해냈다. 북유럽 사람들은 눈빛 자작나무를 보고 죽은 사람의 영혼을 떠올렸는지 모르지만 흰 나무껍질은 베툴린(betulin)이라는 화합물 결정의 색깔이다. 겨울에 볕이 비치는 부분과 그렇지 않은 곳의 나무 온도 차는 매우 크다. 자작나무는 겨울 볕을 온통 반사해 나무 양편의 온도가 크게 벌어지는 현상을 아예 막아버렸다. 식물생리학자들은 바로 이 특성 덕분에 자작나무가 유라시아 추운 겨울을 지낼 수 있다고 판단한다. 무심코 지나쳤던 나무의 색에도 웅숭 깊은 뜻이 있다.
소한 대한 지나 곧 입춘이다. 자작나무 우듬지로 물이 올라 봄 잎을 일궈낼 시간도 머지않았다. 곧 봄이다.
김홍표 아주대 약학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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