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이명박의 길, 박근혜의 길
집권당 행태가 퇴행적이다. 대통령이 당 총재를 겸직했던 시대가 연상된다. 대통령은 공천권으로 여당을 쥐락펴락했고, 총재가 임명한 당대표는 대리인에 불과했다. 여당 의원들이 청와대 거수기 노릇하던 시절 입법부는 통법부(通法府)라 얕잡아 불리기도 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연거푸 당대표를 주저앉히더니 가장 아끼는 후배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과도 충돌하는 모습을 보였다. 불화설 이틀 만인 23일 윤 대통령과 한 위원장이 충남 서천 화재 현장에서 만나면서 여권 내홍은 봉합 수순에 들어간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도 제왕적 대통령의 기운은 강하게 느껴진다.
헌법의 권력분립 원칙에 따라 국회가 대통령을 견제할 수 있게 된 건 대통령의 당 총재 겸직 금지와 제1당에 비례대표 3분의 2를 우선 배분했던 선거법을 개정해 여소야대가 가능해져서다. 대통령과 국회의 건강한 긴장관계는 민주정치의 필수요소이고, 이를 위해선 여당의 적절한 역할이 중요하다.
총재가 아니었던 첫 대통령 노무현은 열린우리당 창당 후 지지 호소 발언을 했다가 탄핵소추 빌미를 제공했다. 헌법재판소는 후보자가 아직 정해지지 않은 때여서 대통령의 선거 개입을 부정했지만, 정치적 중립의무 위반은 인정했다. 다만, 법 위반의 중대성이 없다며 탄핵기각 결정을 했다.
탄핵과 별개로 박근혜는 공무원의 당내 경선운동 금지를 정한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상고를 안 해서 대법원 판례는 없지만, 대통령이 청와대 조직을 활용해 공천관리위원회 구성 개입, 계획적인 여론조사 실시, 공천 룰 관련 자료 전달, 지역구 변경 종용 등의 행위로 여당 공천에 개입할 경우 형사처벌을 받을 수 있다는 선례가 만들어진 셈이다.
박근혜는 2인자를 거부하고 총선에 임했다는 점에서도 역대 대통령과 달랐다. 새 얼굴을 총선 간판으로 내세우는 건 역대 대통령의 술책이었다. 당 총재를 겸직했던 양김도 예외가 아니었다. 1996년 총선 때 김영삼은 말 안 듣는 총리라고 내쳤던 이회창을, 2000년 총선 때 김대중은 대선 경쟁자였던 이인제를 당의 얼굴로 등장시켰다. 부산 출신 노무현과 문재인은 정권 2인자이자 호남 출신인 정동영과 이낙연을 각각 앞세웠다. 이명박은 2008년 총선에서 친박계를 숙청했지만, 2012년 총선 때 자신의 인기가 떨어지자 강력한 경쟁자였던 박근혜를 비대위원장으로 발탁했다. 비록 친이계가 대거 공천 탈락했으나, 총선에선 승리했다. 대통령에 대한 평가를 새 인물에 대한 기대감 투표로 바꾸는 전략이다.
윤 대통령도 이를 따르고자 한 위원장을 선임했으나, 김건희 여사 문제가 발화점이 되어 양자 갈등이 고조된 것으로 알려졌다. 한 위원장의 가장 큰 약점인 ‘대통령 아바타’라는 프레임을 깨기 위해 사전에 합을 맞춘 것인지, 검사 시절 스타일대로 서로 직진하다 부딪친 건지 진실은 알 수 없다. 공천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지 않아 뇌관은 살아 있으니, 향후 갈등과 균열의 수위를 보면 알 수 있을 듯하다. 하지만 권력암투를 지켜보고 싶은 국민은 없다. 대통령의 측근이 모처에서 비대위원장을 만나 사퇴를 압박하고, 그 사실이 언론을 통해 흘러나와 대한민국을 뒤흔드는 수준의 정치는 끔찍하다.
국민의힘 당헌은 대통령과 당의 관계를 긴밀한 협조관계로 규정하고 있다. 법원은 대통령의 단순한 의견 개진은 통상적인 정당활동으로 허용된다고 봤다. 하지만 공천 개입은 다르다. 인구위기, 저성장과 경기침체, 미·중 패권경쟁에 따른 신냉전시대 도래, 신기술에 따른 산업구조 개편 등 시급히 해결책을 마련해야 할 과제들이 산적해 있다. 절체 절명 시기에 미래 비전은 사라진 채 공천 다툼만 해선 곤란하다. 반 발짝 물러섰던 이명박의 길인가, 선거법을 위반한 박근혜의 길인가. 지금 필요한 것은 국민에게 감동을 주는 정치다.
김정현 전북대 교수·헌법학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단독] 강혜경 “명태균, 허경영 지지율 올려 이재명 공격 계획”
- “아들이 이제 비자 받아 잘 살아보려 했는데 하루아침에 죽었다”
- 최현욱, 키덜트 소품 자랑하다 ‘전라노출’···빛삭했으나 확산
- 수능문제 속 링크 들어가니 “김건희·윤석열 국정농단 규탄” 메시지가?
- 윤 대통령 ‘외교용 골프’ 해명에 김병주 “8월 이후 7번 갔다”···경호처 “언론 보고 알아
- 이준석 “대통령이 특정 시장 공천해달라, 서울 어떤 구청장 경쟁력 없다 말해”
- “집주인인데 문 좀···” 원룸 침입해 성폭행 시도한 20대 구속
- 뉴진스 “민희진 미복귀 시 전속계약 해지”…어도어 “내용증명 수령, 지혜롭게 해결 최선”
- 이재명 “희생제물 된 아내···미안하다, 사랑한다”
- ‘거제 교제폭력 사망’ 가해자 징역 12년…유족 “감옥 갔다 와도 30대, 우리 딸은 세상에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