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환경오염 피해 개연성만으로 배상케 한 첫 대법 판결
대법원이 개인의 환경오염 피해 증명 책임을 대폭 완화하는 새 판례를 제시했다. 유해물질 누출 같은 사고가 발생할 개연성만 있어도 기업이 피해자에게 손해를 배상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법원 판결을 환영한다. 그동안은 집이나 일터 주변에 공장이 들어선 뒤 병을 앓게 된 경우 피해자가 모든 인과관계를 엄밀하게 증명해야 했다. 피해를 본 것도 억울한데 소송 과정에서 복잡하고 어려운 과학적 사실로 피해를 입증하는 일은 더한 고통이었다.
대법원은 24일 황모씨 등 19명이 반도체용 화학제품 제조업체 A사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 소송 상고심에서 황씨 등이 일부 승소한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고 밝혔다. 황씨 등은 2016년 6월 A사가 운영하는 충남 금산의 공장에서 불산 누출사고가 발생해 호흡기 질환 등을 앓았다며 A사를 상대로 소송을 냈다.
일반적으로 손해배상청구 사건에서 가해자의 가해 행위, 피해자의 손해 발생, 가해 행위와 손해 발생 사이의 인과관계 증명 책임은 피해자에게 있다. 기존 판례도 A사에 배상 책임을 물으려면 공장에서 배출된 유해물질이 피해자에게 도달해 피해가 발생했다는 사실을 피해자들이 입증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피해자에게 입증을 요구하는 것은 공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사법적 구제를 어렵게 한다. 전문 지식과 수사·조사권이 없는 개인이 환경오염으로 인한 피해의 인과관계를 밝히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기업은 상대적으로 조사가 수월하고, 원인을 알아도 책임을 피하고자 은폐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1심 법원은 황씨 등의 청구를 일부 받아들여 회사가 1인당 위자료 500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고, 2심 법원은 위자료를 700만원으로 늘렸다. 대법원은 원심을 확정하며 “피해자가 여러 간접사실을 통해 배출된 오염물질 등으로 인해 다른 사람의 생명·신체 및 재산에 피해가 발생한 것으로 볼 만한 상당한 개연성이 있다는 점을 증명하면 인과관계가 추정된다고 봐야 한다”고 새로운 판단 기준을 제시했다. 피해를 뒷받침하는 간접사실로는 시설의 가동 과정과 설비, 투입·배출된 물질의 종류와 농도, 기상 조건, 피해 일시·장소 등을 꼽았다.
이번 대법원 판결이 환경오염 관련 분쟁을 조기에 수습하고 피해자들의 고통을 덜어주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기업도 환경오염 방지에 노력하고, 사고 발생 시 피해자 구제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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