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포해변의 산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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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뚜벅뚜벅 강릉을 여행했다.
고속열차가 도심 한가운데를 지나고, 대중교통으로도 해변과 습지, 호와 산에 쉽게 닿을 수 있으니 편애할 수밖에 없는 여행지다.
난곡동 야산에서 쓰러진 나무가 전깃줄을 건드렸고, 그때 생긴 불씨가 강풍을 타고 경포해변까지 번져 축구장 500개 면적을 태웠다.
해변의 산책자였던 우리는 예술의 경험을 통해 망각할 뻔한 기억을 붙잡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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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틱] 강혜승 | 미술사학자·상명대 초빙교수
최근 뚜벅뚜벅 강릉을 여행했다. 고속열차가 도심 한가운데를 지나고, 대중교통으로도 해변과 습지, 호와 산에 쉽게 닿을 수 있으니 편애할 수밖에 없는 여행지다. 지난주 개막한 동계청소년올림픽 덕분에 누린 문화혜택은 덤이었다. 자연을 찾아 나선들, 도시 감성을 버릴 수 없는 이방인이자 여행자의 시선으로 강릉을 누볐다는 얘기를 하고 있다.
경포해변에서의 경험은 그중 특별했다. 해안을 따라 걷다 검은 물체를 맞닥뜨렸다. 사나운 바닷바람에도 묵직하게 모래사장 한편에 자리한 높다란 검은 직육면체 구조물이었다. 바다를 마주한 앞면의 입구를 통해 들어가 중앙 의자에 앉아 있노라니 내부를 가득 채운 탄 내음이 후각을 자극했다. 좁은 공간 안은 고요했고, 한정된 틀 안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후각에 집중하는 경험은 자못 처연한 기분까지 들게 했다.
구조물의 정체는 예술품이었다. 경포해변 모래사장에서 열린 ‘지구를 구하는 멋진 이야기들’이라는 전시 출품작 중 하나로, 설치미술가 이창훈의 ‘에피그램’이었다. 해변에서 우연히 만나게 되는 작품을 타인들은 어떻게 경험하는지 궁금해 한동안 그 주위를 서성였다. 누군가에겐 바람을 피할 안식처였고, 누군가에겐 다리를 쉬어갈 휴식처가 됐다. 양말까지 야무지게 벗어 모래를 탈탈 털어내는 이도 있었고, 한참 동안 밀어를 속삭인 연인들도 있었다.
옳고 그를 것 없는 저마다의 경험이었다. 흔히 순수예술은 삶과 유리돼 있다고 여겨지기 쉬우나, 실제 작품은 만든 이는 물론 보는 이의 경험 속에서 완성된다. 모래사장 위 검은 구조물 역시 개별 경험 속에서 나름으로 의미됐으니, 그것으로 족했다. 다만 생각해 볼 여지를 작품은 남긴다. 작가는 5m 높이의 구조물 내벽에 전소된 나무의 재를 채우고, ‘묘비명’이라는 어원의 제목을 빌려와 잊힌 사건을 불러내고자 했다.
추모비를 닮은 이 검은 구조물은 사실 경포해변이었기에 상징성을 갖는 장소특정적 작품이다. 기억을 더듬자면 강릉은 지난해 4월 큰 산불을 겪었다. 난곡동 야산에서 쓰러진 나무가 전깃줄을 건드렸고, 그때 생긴 불씨가 강풍을 타고 경포해변까지 번져 축구장 500개 면적을 태웠다. 솔향으로 불릴 만큼 일대 수종이 소나무였던지라 불길은 기름 성분의 송진을 불쏘시개로 지나는 자리마다 남김없이 태워 재를 남겼다.
이방인에게는 과거의 사건으로 기억이 희미한데, 지역의 상처는 현재진행형이다. 불과 반나절 만에 터전을 잃은 이재민들은 세 계절을 보내고도 여전히 불안정한 삶을 산다. 까맣게 그을려 벌채된 나뭇더미가 아직 곳곳에 쌓여 화마의 상처를 드러낸다. 경포 일대 풍광이 쓸쓸해 보인 건 단지 시린 계절 탓이 아니었다.
탄 냄새는 산불을 직접 겪은 이들에게 트라우마로 작동한다. ‘에피그램’ 공간에 진동하던 탄내는 타인들에게 사건을 기억하게 했다. 작품 안에서 모래를 털던 이가 뒤늦게 작품설명을 발견하곤 “삶과 죽음의 경계였구나” 탄식하던 순간이 생생하다. 해변의 산책자였던 우리는 예술의 경험을 통해 망각할 뻔한 기억을 붙잡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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