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형의 너도 늙는다] 노년의 이야기가 진화한다
김은형 | 문화부 선임기자
연초부터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환갑 지난 양자경이 넷플릭스 드라마 ‘선 브라더스’에서 삼합회 보스 마누라 자리를 박차고 스스로 보스가 되겠다며 ‘걸스, 비 앰비셔스!’(소녀여, 야망을 가져라!)를 외치더니, ‘룰루레몬’ 매장 포스터에 딱 버티고 서서 ‘오십 넘은 아줌마가 십만원짜리 레깅스가 웬말이냐’ 자조하는 나를 향해 ‘당장 신용카드를 꺼내 집 나간 엉덩이를 찾아오고(룰루레몬 레깅스는 없는 엉덩이도 만들어준다고 할 정도의 보정력을 자랑한단다) 미뤄둔 필라테스 등록을 하라’고 압박한다. 내가 아는 한 양자경은 톱스타보다 요가강사를 선호하는 세상 쿨한 이 브랜드가 유일하게 선택한 글로벌 스타다.
새해를 맞아 책 한권 읽어볼까 싶어 들어간 교보문고 사이트에는 노년을 주제로 한 일본의 짧은 정형시 센류 공모전 수상작들을 묶은 ‘사랑인 줄 알았는데 부정맥’이 국민 귀염둥이 푸바오 관련 서적을 누르고 시·에세이 베스트셀러 2위에 올라있다. ‘젊게 입은 옷/자리를 양보받아/허사임을 깨닫는다’, ‘일어나긴 했는데/잘 때까지 딱히/할 일이 없다’, ‘연명치료/필요없다 써놓고/매일 병원 다닌다’ 등 처절한 자기객관화의 예술적 산물을 빚어낸 신인 작가들의 신상명세에는 지긋한 나이 뒤 ‘무직’이 릴레이로 적혀 있다.
대목인 설 연휴 극장 개봉영화의 주연배우들은 윤여정(‘도그데이즈’), 나문희·김영옥(‘소풍’)이다. 2009년 드라마 ‘태희혜교지현이’가 떠오른다. 이들 셋 평균 나이는 82살. 또 다른 설 경쟁작 ‘데드맨’의 주인공 김희애는 56살 너무 ‘애기’라 끼워넣기 어색하다.
변화의 시그널이 사방에서 쏟아지고 있다. 달력으로 따지면 후회로 점철된 연말에나 어울린다고 생각했던 노년콘텐츠들이 새해 벽두를 장식하고 있다. 70살에 운동을 시작해 90대에 40대의 폐활량을 유지한다는 건강기사는 이제 식상할 지경이다.
최근 몇년 새 노년 관련 문화콘텐츠들이 부쩍 늘었지만 마음을 움직인 것은 드물었다. 늙어도 즐겁게 산다고 주장하는 글들에는 묘한 구차스러움이 느껴졌고, 노년의 지혜 어쩌구 하는 이야기에는 진심을 찾아볼 수 없었다. 눈물 나는 모성애 등에 헌사를 보내는 드라마·영화를 보면 ‘저런 식으로 등골 빼려고? 어림도 없다’ 짜증이 밀려왔다. 가장 싫은 건 백세노인이 풀어놓는 인생 조언. 백년을 살고도 훈수가 삶을,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걸 깨닫지 못했다면 그야말로 깨달음이 없는 삶 아니겠는가.
그런데 최근 콘텐츠들은 확 달라졌다. 제목부터 ‘노인=관조’라는 도식처럼 보여 호감이 가지 않던 영화 ‘소풍’(2월7일 개봉)을 보고 뒤통수를 맞은 듯 얼얼했다. 이제까지 노인을 그려온 대중 영화·드라마와 달리 독할 만큼 객관적으로 현실을 다루고 있었다. 부유한 이도, 빠듯한 이도 이제는 작은 여유를 가질 만한 나이건만 자식들은 여전히 바지 안 가시처럼 발목을 찔러대고, “소풍 가자!” 결연히 외쳤다가 곧바로 “내일 가자”가 나오는 몸은 통제를 벗어난 지 오래다. 영화는 모든 장면에서 노인을 화면 안 피사체에서 끌어내 나의 부모, 나의 미래와 연결한다.
‘사랑인 줄 알았는데 부정맥’이 장안의 화제가 되는 것도 ‘소풍’의 비범함과 같은 맥락으로 읽힌다. 수록된 공모전 수상작들이 독자를 매혹하는 이유로 유머감각을 빼놓을 수 없는데, 이 유머감각은 자기객관화에 입각한 당사자성에서 나온다. 다음 세대가 재단하거나 보고 싶은 노년의 모습도, 자기애와 꼰대 마인드를 장착한 훈수도 아닌 자신의 이야기가 노년콘텐츠를 진화시키고 있다.
젊고 탄탄한 근육질의 모델이 ‘나처럼 해봐요. 이렇게’ 포즈를 취하면 “너도 늙어봐라” 넘기게 되지만, 나보다 열살 많은 양자경이 큰 눈을 뜨고 압박하니 지갑을 열게 된다. 노령화 사회로 함께 늙어가는 동료들이 늘어나면서 좋은 점 하나는 들을 만한 나이듦의 이야기들이 생겨나는 것 아닌가 한다. 이를테면 시 한 편이 알려주는 삶의 노하우같은 것! ‘분위기 보고/노망난 척해서/위기 넘긴다’(‘사랑인 줄 알았는데 부정맥’ 중, 이케다 구루미·여성·71살·주부)
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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