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종훈의 근대뉴스 오디세이] 박 터지는 설 유희 `석전 놀이`를 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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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흐르면 변하는 것도 있고 사라져 가는 것도 있다.
100년 전 우리 조상들의 놀이를 한번 찾아가 보자.
먼저 주로 정월이나 대보름에 많이 하던 놀이인 삭전(索戰) 또는 인승(引繩), 경남 진주 지방에서는 해희(蟹戱, 게 놀이)라고 하는 줄다리기를 살펴보자.
줄다리기 관중이 김해에서만 5~6만명이 모였다는 기사를 보면, 당시의 줄다리기는 모든 주민이 모이는 하나의 집회같은 놀이였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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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월이나 대보름엔 전국서 줄다리기 대성황 동네마다 합심해 기 들고 수만명 한판 승부 서울 마포에선 격렬한 돌싸움에 부상자 속출 서로를 다치게 하는 일, 100년전보다 더 많아
세월이 흐르면 변하는 것도 있고 사라져 가는 것도 있다. 생자필멸(生者必滅)인 것이다. 음력 정월 초하루, 즉 설날에는 여러가지 놀이가 있었다. 척사(擲柶)라고 불렸던 윷놀이도 있었고 각희(角戱)라는 씨름대회도 있었다. 지금은 찾아보기 힘든, 놀이라기에는 너무 과격했던 석전(石戰), 즉 돌싸움도 있었다. 100년 전 우리 조상들의 놀이를 한번 찾아가 보자.
먼저 주로 정월이나 대보름에 많이 하던 놀이인 삭전(索戰) 또는 인승(引繩), 경남 진주 지방에서는 해희(蟹戱, 게 놀이)라고 하는 줄다리기를 살펴보자. "경남 김해에서는, 음력 정월 16일 오후 8시경에 김해 군민은, 내려오던 습관에 의하여 좌부(左部) 우부(右部) 두 부로 편을 갈라 줄다리기를 하였는바, 관람자가 무려 5~6만명에 달하여 무릇 무전(無前)의 성황을 이룬 가운데 좌부가 승리를 하여 일대 장관을 이루었다더라." (1921년 2월 27일자 매일신보)
"경남 마산에서는 오는 음력 정월 대망의 달 밝은 명절을 이용하여 삭전(索戰)대회를 개최할 터이라는데, 두 팀의 간부 제씨는 매일 밤 집합하여 방침을 토구(討究) 중이라는데 이번의 줄 싸움이 얼마나 격렬화 할 것을 예상할 수 있다더라." (1924년 2월 3일자 동아일보)
"전남 나주에서는 십수 년 전부터 매년 구정월(舊正月)이면 삭전 대회를 모든 군(郡)이 행하던바, 금년에는 음력 정월 23일에 시작하여 5일간을 계속한 후 28일 오전에 결승전이 되었는데 우승은 서부군(西部軍)으로 돌아갔다 하며, 연일 관중이 수만에 달하여 대성황을 이뤘다더라." (1923년 3월 27일자 동아일보)
"경남 밀양군 하서면 무안리에서는 연중행사로 실행해 오는 줄다리기 싸움은 지난 10일 오전 9시부터 시작되어 11일 오후 3시에 승부를 판단한 모양인데, 때가 마침 농가의 한가한 때이므로 일 년 중 한 때라 하고 모인 관람자는 대략 1만5,000명이나 되는 성황을 이루었더라." (1923년 3월 12일자 매일신보)
줄다리기 관중이 김해에서만 5~6만명이 모였다는 기사를 보면, 당시의 줄다리기는 모든 주민이 모이는 하나의 집회같은 놀이였던 것 같다.
물론 이로 인해 작은 사고들도 많이 생겼다. "진주(晋州)에서는 4만여명의 군중이 모여 줄다리기한 일은 근년에 처음 보는 장관(壯觀)이요, 당일 부상자는 50여명에 달하였고 경찰서에서는 순사 전부가 나와 만일의 사태에 경계하였다더라." (1922년 7월 1일자 동아일보)
"춘천의 줄다리기 싸움은 아침 8시부터 사방으로 모여드는 군중은 각각 동네마다 기(旗)를 들고 모여드는데, 70~80리 되는 원정(遠程)을 불고(不顧)하고 오는 것이 결국 사람 바다를 이루고 당일 모인 사람은 아마 적어도 3만~4만명에 이르렀더라. 병원에서 구호반이 나오고 경찰서에서는 서장 이하 50~60명의 경관대가 출동하여 경계하느라고 바빴으며...(중략)...이날 다행한 것은 중상(重傷)한 자는 없었으니 다소의 경상(輕傷)한 자는 불소(不少)하였고 심지어 주막집까지 무너트렸다더라." (1922년 3월 10일자 매일신보)
줄다리기는 지금도 볼 수 있는 놀이지만 지금은 없어진 석전(石戰)이라는 돌싸움 놀이도 있었다. 이 돌싸움은 서울 및 서울 근교에서 주로 행하던 놀이였다.
"2일 오후 5시경에 고양군 용강면 창전리 벌판에 장정과 아이들 100여명이 모여 피차에 석전(石戰)질이 일어나서 일시는 매우 위험하였는데, 관할 주재소에서는 수 명의 경관이 출장하여 진정시키고 이어서 경계 중이라더라. 해마다 음력 정초가 되면 경성 부근 각 부락에서는 동리끼리 서로 편을 짜 가지고 돌팔매로 싸우는 일이 있으므로, 다수한 부상자가 생기고 이 때문에 이웃 동리 간에 아주 격(隔)이 지게 되는 일이 있으므로 경기도 경찰부 보안과에서는 관내 각 경찰서에 통첩(通牒)하여 금년 정초에는 석전을 일체 엄금하도록 하였다더라." (1923년 2월 4일자 동아일보)
"고양군 용강면 노고리에서 그제 5일 아침에 그 부근에 거주하는 청년 남자 수백여명이 모여, 이전부터 습관으로 내려오던 석전을 시작하고 찬바람 추운 날에 용기 있게 격전(激戰)하는 것을, 그 곳 파출소 순사가 보고 그와 같이 운동적 행동은 좋으나 그것으로 인하여 사람의 사생(死生)이 생기는 일이 많이 있으므로 오히려 위험하다 하여 해산을 명령하였다." (1922년 1월 7일자 매일신보)
돌싸움으로 가장 유명했던 곳이 지금의 서울 마포 동막(東幕) 근처였다. 1924년 2월 27일자 매일신보 기사다. "22일에는 약 100명 가랑의 아이들이 오후에 돌싸움(石戰)을 하였다는 말을 들은 경관들은 급히 쫓아가 해산을 시켰으나 형세는 오히려 험악하여...(중략)...24일까지도 편싸움을 계속할 눈치이므로 만일의 경우에는 대대적으로 경관대가 출동하여 일거(一擧)에 해산을 시키는 동시에 일망타진(一網打盡)으로 검거할 계획이라더라."
그렇다면 석전은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 1922년 1월 8일자 매일신보에 자세히 나와 있다. "조선에서는 지금으로부터 300년 전부터 부락 사람들이 서로 대립하여 편을 지어 가지고 석전(石戰)이란 고유의 유희적 편싸움을 하는 습관이 있는데, 그 수는 수천 명에 달하여 서로 생명과 몸을 돌아보지 아니 하고 맹렬히 격전하여 왕왕 사상자를 내는 비참한 일을 연출하는데...(중략)...1912년도에 경찰범 처벌령에 의하여 취체를 엄중히 한 까닭으로 인하여, 일시는 근본적으로 이러한 폐풍(弊風)이 없어졌더니 최근에 이르러도 이러한 습관이 발생되어...(중략)...이와 같은 유희적 편싸움은 비문명적 유희이므로 절대적으로 근절(根絶)하지 아니 하면 아니 되겠다고 경무 당국자는 말하더라."
세월이 가면 '석전'같이 사라져야 할 것이 있고, 세월이 가도 '삭전'처럼 사라지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돌싸움은 이제 자취를 감췄으나 서로가 서로를 다치게하는 일들은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 버티고 있다. 오히려 100년 전보다 우리 주위에 더 많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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