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랄 1급’ 연기···“가랑이 찢어 체급 늘렸죠”[인터뷰]
성격 괴팍한 장애인 연기
장애 여성 고정관념 탈피
‘독립영화 좀 본다’는 관객이라면 훌쩍 큰 키에 동그란 볼이 인상적인 배우 임선우를 눈여겨보았을 것이다. 독립영화계에서 다져진 임선우의 영토는 매우 넓어서, <타짜> 대사처럼 ‘그의 땅을 밟지 않고 지나기가 여간해선 어렵’기 때문이다. 이 영토는 확장 중이다. 상업영화로, TV 드라마로 꾸준히 영역을 넓히고 있는 임선우가 첫 장편 주연작 <세기말의 사랑>으로 24일 극장을 찾았다.
개봉을 이틀 앞둔 지난 22일 서울 삼청동에서 만난 임선우는 이번 영화가 “가랑이를 찢어가며 체급을 늘린 경험”이었다고 했다.
<69세> 임선애 감독의 두 번째 장편인 <세기말의 사랑>은 1999년 12월, 세상이 끝날지 모른다고 생각한 ‘영미’(이유영)가 짝사랑 상대 ‘도영’(노재원)을 향해 용기를 냈다가 모든 것을 잃고 21세기를 맞으며 벌어지는 이야기다. 임선우는 자신의 남편을 좋아하는 여자 영미와 기묘한 동거를 하게 되는 ‘유진’을 연기했다.
영화 속 유진은 예쁘다. 성격은 괴팍해 주변에 상처 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한다. 그리고 전신마비 장애인이다. 목 아래로는 조금도 움직이지 못한다. 먹는 것부터 입는 것, 씻는 것까지 남의 힘을 빌려야 하는데 도통 친절하지 않다. 오죽하면 돌봄노동자들이 붙인 별명이 ‘장애 1급’을 비꼰 ‘지랄 1급’이다. 그간 대중매체가 재현해 온 장애 여성의 전형적인 모습, 쉽게 말해 ‘착한 장애인’과 거리가 멀다.
임선우가 시나리오를 처음 받아보았을 때 그는 유진의 “심장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고 회상했다. “아무 배경지식 없이 읽기 시작했어요. 유진은 영미의 이야기가 한참 진행된 이후에 등장하는데, 등장하고도 시간이 좀 지난 후에야 유진이 장애인이라는 사실이 드러나요. 처음에는 유진의 외면적 장애가 크게 다가왔는데 갈수록 이 사람의 뜨거운 피가 느껴지는 것 같더라고요. 한 인간으로서 사랑하고 욕도 하고 신경질도 부리는, 나랑 비슷한 마음이 느껴졌죠.”
하지만 이런 인물을 연기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이 연기가 누군가에게 상처가 되지 않을까 걱정도 됐다. 그때 감독과 동료 배우의 도움은 절대적이었다. 임 감독은 유진의 실제 모델인 친척 어르신과의 만남을 주선했다. 임선우는 이 시간을 ‘생명력 넘치는 한 인간과의 만남’으로 기억한다.
“굉장히 꼿꼿하셨어요. 저보다 크게 웃으셨고요. 화단에 꽃이 많았는데, 주로 집에서 지내다보니 식물에 위로를 많이 받으신대요. 식물은 움직이지 않지만 그 안에 생명이 있잖아요. 사실 처음엔 이것저것 물어볼 생각으로 갔는데 직접 뵙고 나니 자잘한 질문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디가 불편해도 돌봄 봉사자들을 기다려야 하는 게 그냥 그분한테는 삶인 거예요. 제3자가 쓸데없이 연민하려 드는 것일 뿐이고요. 그 만남 이후 내가 어디 집중해야 하는지 방향성을 잡을 수 있었어요.”
영화 속 유진은 몸만 움직이지 못할 뿐 심장이 뛰는 생생한 사람으로, ‘구체적인 사랑을 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임선우는 “사랑하는 사람을 만져주고, 무언가를 함께할 수 없지만 제 눈에 유진의 사랑은 구체적이었다”며 “관객 분들이 그것을 느껴주시길 바란다”고 했다.
임선우는 이번 영화를 통해 한뼘 성장했다고 느낀다. “가랑이가 찢어지면서 체급을 늘리는 느낌이랄까요. 정말 ‘헉헉’ 대면서 했어요. 그런데 그럴 때 배우가 성장하는 거래요. 이런 역할과 작품이라면, 기회가 닿을 때마다 반드시 할 생각이에요. 정체되지 않고 배우로서 성장할 수 있으니까요.”
임선우는 2017년 <더 테이블>(김종관 감독)을 통해 데뷔했다. 배우가 되기 전에는 평범한 직장인이었다. 4년 다닌 직장을 그만두고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진학한 것은 30대 들어서의 일이다. 이후 <연애 빠진 로맨스> 같은 상업영화에서 인상을 남기기도 했지만, 주된 활동무대는 독립영화였다. 지난해 화제작인 <비밀의 언덕>의 담임 선생님도 임선우를 통해 탄생한 인물이다. 그만큼 독립영화에 대한 애정도 크다. “독립영화는 저에게 뭔가에 얽매이지 않고 연기하는 기회를 줬어요. 자본으로부터 자유롭게 많은 걸 시도해볼 수 있으니까요. 동료들을 보면서 연기 외에 영화를 대하는 자세 같은 것도 배울 수 있었고요.”
임선우는 ‘아름다움’에 관해 자주 생각한다. 그리고 아름다움에 무뎌지지 않으려 노력한다. “살면서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배우에게는 더욱이요. 나무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너무 아름답거든요. 그런데 천지에 보이는 게 나무라, 아무것도 아닌 것 같잖아요. 저는 그런 것을 놓치지 않으려 해요. 그래야 제 연기에도 아름다움이 배어나올 테니까요.”
러닝타임 116분. 12세 이상 관람가.
최민지 기자 min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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