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진출한 日기업 승승장구 …'유턴'이 능사 아니다

2024. 1. 24.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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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기업에서 배우는 저성장 돌파구 上

2024년 일본 경제계의 가장 큰 화두는 '임금 인상'이다.

일본에서 가장 큰 노조단체인 일본노동조합총연합회(연합)는 올해 춘계 노사교섭(춘투)에서 5% 이상의 임금 인상을 요구할 방침이다. 일본 최대 경제단체인 일본경제단체연합회(경단련)는 춘투 교섭지침에서 회원사들에 작년 이상의 의욕과 결의를 가지고 (임금 인상에) 적극적으로 나서주기를 부탁했다. 지난 5일 연합의 신년회에 참석한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는 "2023년을 상회하는 임금 인상을 실현하기 위해 정책을 총동원하겠다"고 강조했다.

노사정이 임금 인상에 한목소리를 내는 모습이 한국에서는 낯선 풍경으로 비칠 것이다. 그 이면에는 노동력 부족을 포함해 일본 나름의 여러 이유가 있지만, 기업의 이익을 대변하는 경제단체가 임금 인상에 적극적일 수 있는 것은 기업의 실적이 상당히 호전되었기 때문이다.

고용 환경은 기업 실적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일본에서 버블이 붕괴된 이후 실업률이 가장 높았던 시기는 2002년과 2009년이었는데 이때는 영업이익도 최악이었다. 버블기 이후 실업률이 가장 낮았던 때는 2018~2019년과 2022~2023년인데, 영업이익이 사상 최대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리고 고용 환경이 안정되자 자살률·범죄율이 낮아지면서 사회도 안정되었다.

새해 들어 일본 주가가 버블기 이후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다는 뉴스가 들리면서 한국에서도 일본 주식과 기업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다. 최근의 호황에는 저금리와 엔 약세도 일조했지만, 사실 코로나19 시기를 제외하면 지난 10년간 일본 기업의 영업이익은 꾸준히 증가해왔다. 그 이면에는 경쟁력 회복을 위한 기업의 힘겨운 노력도 있었다.

2011년도(2011년 4월~2012년 3월) 결산에서 배당금조차 줄 수 없을 정도로 어려웠던 소니는 히라이 가즈오가 최고경영자(CEO)로 취임하면서 대규모 구조 개혁을 단행했고, 2017년도 결산에서 창사 이래 최고액인 7350억엔의 영업이익을 발표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이전 소니의 최고 기록은 무려 20년 전인 1997년도의 5200억엔이었다.

히라이가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뒤에는 그가 발탁한 요시다 겐이치로 CEO 체제에서 히라이 시대의 기록을 연거푸 경신하고 있다. 2021년도 결산에서는 1조2000억엔의 영업이익을 발표했는데, 그전까지 1조엔 이상의 영업이익을 낸 일본 기업은 도요타가 유일했다. 2022년도 결산에서는 도요타와 소니를 포함해 무려 6개 일본 기업의 영업이익이 1조엔 이상이었다. 2023년도 결산은 올해 5월께 나오겠지만, 2022년도를 상회할 것이 거의 확실하다.

2021~2022년에 안식년을 가지게 되어 한국에 와 있었는데, 소니가 사상 최대 실적을 내고 있다고 얘기해도 믿지 않는 사람이 많아서 안타까웠다.

일본 기업은 이미 한물간 거 아니냐는 식이었다. 산요처럼 공중분해된 기업도 있고, 샤프처럼 외국 회사에 매각된 기업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도시바는 반도체 부문을 매각하고도 회생하지 못해 상장폐지되었다. 소니, 히타치, 파나소닉 같은 전설적인 기업들조차 존망의 위기를 겪었다. 도요타도 2008년에는 적자를 냈다. 그러나 망한 기업들은 망했지만 살아남은 기업들은 재생에 성공했다. 일본 주가와 고용 환경의 개선이 그 결과다.

살아남은 일본 기업들이 경쟁력을 회복하고 있다. 그들이 생존을 위해 안간힘을 쓸 때 한국은 그들의 노력을 보지 못했다. 한일 관계가 최악을 달리다 보니, 일본 사회와 경제를 폄훼하는 뉴스가 주로 포털을 장식한 것도 한 이유일 것이다. 그래서 워런 버핏이 일본 상사에 대한 투자를 늘린다거나 일본 주가가 버블기 최고점에 근접해 간다는 뉴스에 새삼스레 놀란다.

잃어버린 20년을 겪으며 일본 기업은 무엇을 깨닫고 무엇을 실천했을까? 저성장기 일본에서 그들은 생존을 위해 어떤 전략을 택했을까? 그들의 분투 그리고 생존의 기록은 그들과 마찬가지로 성장의 한계에 부딪혀 고민하고 있는 한국 기업에 시사하는 바가 많을 것이다.

저성장기 일본 기업의 생존 전략은 여섯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내수 시장이 한계에 부딪히자 해외 시장에 사활을 걸었다. 값싼 노동력이 아니라 시장을 찾아 나갔다. 둘째, 경쟁력을 상실한 사업은 과감히 포기하고 신사업을 개척했다. 이 과정에서 B to C의 비중을 낮추고 B to B의 비중을 높여 공급망에서 필수불가결한 위치를 확보했다. 셋째, 규모가 아니라 이익률에 집중했다. 넷째, 첨단 기술 개발을 포기하지 않았다. 다섯째, 기업 간 합종연횡으로 부족한 인력과 기술을 보완했다. 여섯째, 거버넌스를 개선했다.

일본을 아직도 수출 중심 국가로 보는 사람이 많은데 이는 잘못된 정보다. 반대로 내수 시장이 크기 때문에 일본 기업이 견딜 수 있다는 견해 역시 일본 경제에 대한 큰 오해 중 하나다. 인구가 늙고 감소하는 경제에서 시장은 커질 수 없다. 지난 30여 년간 일본의 실질 국내총생산(GDP)은 연평균 1%도 성장하지 못했다. 시장이 커져야 기업도 성장의 기회를 갖는다. 일본에서 내수 시장을 고집한 기업은 살아남지 못했다. 해외 시장을 개척한 기업이 살아남았다. 그러나 자국에서 생산해 수출하는 전략이 아니라 해외에서 생산해서 해외에서 판매하는 전략을 취했다. 요동치는 환위험을 피하고 수송비를 절감하며 나라마다 다른 규제와 불안한 국제 정세에 대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지노모토는 현재 시가총액이 3조엔 정도인 음식료품 제조 기업이다. 세계 최초로 MSG를 개발·판매한 회사로 유명하다. 음식료품은 내수 시장 위주라는 편견과 달리 매출액에서 일본이 차지하는 비중은 2023년 3월 기준 34%밖에 되지 않는다. 그런데 아지노모토의 유형고정자산에서 일본이 차지하는 비중도 42.5%에 불과하다.

이제 아지노모토 사업의 기본은 해외 생산, 해외 판매가 되었다. 자국에 없는 제품을 해외에서 생산·판매하는 것은 물론이고, 기초 연구는 일본에서 하지만 제품 개발 연구는 현지에 맡기고 있다. 현지인 입맛에 맞는 제품을 개발하기 위해, 나라마다 다른 식품 관련 규제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해서다.

아지노모토가 특이한 케이스가 아니다. 간장 제조 업체로 유명한 기코만도 매출과 유형고정자산에서 일본이 차지하는 비중이 각각 25%, 49%에 불과하다. 아지노모토도 기코만도 계속해서 자국 생산과 판매 비중이 축소되고 있다. 그러나 매출액과 영업이익은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정체된 자국 시장에만 머물렀다면 거둘 수 없는 성과다.

한편 이 두 회사에 가장 중요한 해외 시장은 중국이나 아시아가 아니라 미국이다. 매출과 유형고정자산에서 미국이 차지하는 비중이 다른 나라보다 높다. 일본 기업의 해외 생산과 매출을 보면 북미와 유럽 비중이 생각보다 높은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는 값싼 노동력보다는 시장을 찾아 움직인 일본 기업의 전략에 기인한다.

2022년도 일본 내각부 조사에서 '생산설비를 해외로 옮긴 이유'를 묻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 '현재 혹은 미래의 수요를 고려해서'가 38.4%, '현지 고객의 니즈에 대응하기 위해'가 19.5%로 1·2위를 차지했다. '노동 비용 절감'이라고 답한 기업은 18.0%에 불과했다. 일본 기업의 이런 전략은 해외직접투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1996~2020년 거의 대부분의 기간에 일본의 해외직접투자에서 북미와 유럽이 차지하는 비중은 50%를 넘었다. 한국은 한 번도 50%를 넘은 적이 없다.

그리고 해외 진출은 단지 제조업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일본에서 가장 큰 은행을 보유한 미쓰비시UFJ파이낸셜그룹은 해외 매출 비중이 이미 50%를 넘었고, 가장 큰 증권회사를 보유한 노무라홀딩스는 40%에 육박한다. 편의점을 운영하는 세븐일레븐과 로손은 2026년 2월까지 아시아와 오세아니아에서 점포를 1만개 이상 늘릴 계획이다. 그 지역 중산층의 증가, 즉 시장 수요를 확인했기 때문이다.

가끔 정치가들이 해외에 진출한 기업을 국내로 돌아오도록 하겠다는 주장을 펼 때마다 가슴이 덜컹한다. 기업이 해외로 나가는 것은 살아남기 위해서다. 기업이 살아남아야 고용도 지키고 사회도 안정될 수 있다는 것이 저성장기 일본이 겪은 경험이다.

[박상준 일본 와세다대학교 국제학술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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