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의 희망’ 밴드 실리카겔 “음악 넘어 재밌는 ‘헛짓거리’ 꿈꿔요”
서울예대 실용음악 전공 학생들이 미디어아트 수업에서 팀을 꾸렸다. 교수에게 과제 작품과 함께 팀명도 제출해야 하는 상황. 정해놓은 팀명이 없어 자칫하면 교수가 제시한, 밋밋하기 그지없는 ‘모더니즘’이란 이름으로 전시해야 할 판이었다. “30초 안에 정해. 그러지 못하면 우리 모두 죽는 거야!” 김건재가 껌통을 던지며 소리쳤다. 그때 껌통에서 네모난 실리카겔 봉지가 튀어나왔다. “실리카겔 어때?” “괜찮은데?” 이는 훗날 결성한 밴드 이름으로 이어졌다.
밴드 실리카겔은 이런 식이다. 방습제라는 의미보다 말맛과 느낌이 중요하다. 음악도 마찬가지다. 거창하고 치밀한 계획과 방법론보다는 멤버들의 영감과 발산이 자연스레 어우러지면 음악이 된다. 노랫말도 의미보다는 소리가 주는 느낌과 이미지 중심으로 빚어낸다. 2015년 발표한 데뷔 미니앨범(EP) 제목은 멤버들 각자가 즉흥적으로 떠올린 여섯 단어를 조합한 ‘새삼스레 들이켜본 무중력 사슴의 다섯가지 시각’이다.
기존 틀을 벗어난 무정형의 음악은 인디신에 신선한 자극을 줬다. 2016년 발표한 정규 1집 ‘실리카겔’은 평단을 사로잡았다. ‘이비에스(EBS) 스페이스 공감’의 신인 발굴 프로젝트 ‘올해의 헬로루키’ 대상과 한국대중음악상 ‘올해의 신인’의 성과도 올렸다. 하지만 2017년 미니앨범 ‘SiO2.nH2O’(실리카겔의 화학식) 이후 멤버들의 병역 의무 이행으로 긴 공백기에 들어갔다.
3년 뒤인 2020년 늦여름, 이들은 싱글 ‘쿄181’로 복귀를 알렸다. 2021년 발표한 싱글 ‘데저트 이글’과 2022년 발표한 싱글 ‘노 페인’은 2년 연속 한국대중음악상 ‘최우수 모던록 노래’로 꼽혔다. 공백기 이후 실리카겔은 더 깊고 탄탄하게 내공을 다졌다. 그리고 그 결정체인 2집 ‘파워 앙드레 99’를 지난달 20일 내놓았다. 1집 이후 7년 만의 정규 앨범이다.
“이번 앨범은 참 즐겁게 작업했어요.” 23일 서울 마포구 서교동 합주실에서 만난 실리카겔 멤버 김한주(보컬·건반·기타), 김춘추(보컬·기타), 최웅희(베이스), 김건재(드럼)는 입을 모았다. 김한주는 “‘데저트 이글’과 ‘노 페인’은 멤버들이 정서적으로 힘들 때 불안과 우울을 이겨내려고 탈출구처럼 썼던 것이었다. 이번 2집은 미친 듯이 즐거운 마음으로 만들었다”고 말했다.
2집은 짧지 않은 여정을 거쳐 탄생했다. 2022년 말 본격적인 준비에 들어간 이들은 지난해 3월 싱글 ‘머큐리얼’, 4월 미니앨범 ‘머신 보이’, 8월 밴드 새소년의 황소윤과 함께한 싱글 ‘틱택톡’을 잇따라 발표했다. 그리고 이들 곡에다 신곡을 더해 모두 18곡을 담은 대작 ‘파워 앙드레 99’로 집대성했다. 가상 캐릭터 ‘머신 보이’를 찾아가는 여정은 이번 앨범으로 종착점을 찍었다.
앨범 표지에 모습을 드러낸 ‘머신 보이’는 그러나 여전히 모호하다. 노랫말이 선명하게 이야기를 드러내지 않는 탓이다. 김한주는 “우리 음악은 모든 걸 선명하게 드러내지 않는다. 감상과 해석은 모든 방향으로 열려있다”고 했다. 몽환적 사운드로 시작해 폭발적으로 달리는 연주곡 ‘온 블랙’으로 문을 연 앨범은 다채로운 스펙트럼의 곡들을 관통해 잔잔한 포크 성향의 ‘피에이치(PH)-1004’로 막을 내린다. 18곡의 배치 순서는 곡을 쓸 때부터 염두에 둔 것이다.
몇몇 곡 중간에 클래시컬한 피아노 솔로나 클라리넷 연주가 들어갔다는 점이 색다르다. 8살 때부터 피아노와 고전음악 작곡을 익힌 김한주는 “특별히 고전음악을 넣어야겠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어릴 적부터 몸에 밴 게 자연스레 나온 것 같다”고 했다. ‘더 림’에서 클라리넷을 직접 연주한 김춘추는 “클래식한 접근은 아니고, 전반부 강렬한 기타와 후반부 부드러운 클라리넷 사운드가 대비를 이루는 전개를 해보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이들은 지난해 일주일에 많게는 두세번씩 공연하며 가장 뜨겁고 바쁜 한해를 보냈다. 웬만한 록 페스티벌 무대에 모두 섰는데, 그때마다 폭발적인 반응이 터졌다. 올해는 국내뿐 아니라 6월1일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열리는 프리마베라 사운드 페스티벌 무대에도 선다. 아시아를 벗어나 유럽에서 공연하는 건 처음이다. 최웅희는 “글로벌 진출을 앞두고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해보려 한다”며 웃었다.
이들은 올해 음악적 성취를 넘어 다양한 재미와 “헛짓거리에 가까운 것들”을 꿈꾼다. “공연과 음악 발매 말고도 재밌는 영상 시리즈나 심지어 게임을 만들어볼까 하는 생각도 해요. 우리를 규정하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요.”(김건재)
서정민 기자 westmin@hani.co.kr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 “이미 충분” 한동훈, “회견 없다” 용산…‘명품백 약속대련’ 의심만 키웠다
- 우크라 포로 65명 태운 러 군수송기 추락…“교환 위해 이동 중”
- 김건희, 마리 앙투아네트, 다이아몬드 목걸이
- 황산테러 당한 패션모델, 다시 카메라 앞 ‘복귀’…정면을 향하여
- 2심도 CJ대한통운이 ‘진짜 사장’…노란봉투법 다시 힘 실릴 듯
- 학교서 초1 저녁 8시까지 돌봐준다...‘늘봄’ 2학기부터 확대
- 서해 ‘북 순항미사일’ 5발 안팎 둥글게 선회…공중폭발 시험 가능성
- 미국 WSJ ‘김건희 2200달러 디올백’ 보도…“한국 여당 뒤흔들다”
- 이재명의 ‘선거제 장고’…지도부에선 ‘병립형 회귀’ 다시 고개
- ‘철새 행보·망언’ 이언주도 영입? 누굴 위한 ‘반윤석열’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