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인지 모호한 ‘구한말’ 굳이 써야 할까

한겨레 2024. 1. 24.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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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죠, 구한말에 그런 일이 있었죠." 강의 중에 나도 모르게, 이렇게 말했다.

'구한말'(舊韓末)을 쓰지 말아야겠다고 맘먹은 지 꽤 오랜데, 또 불쑥 튀어나왔다.

"구한말과 구미 열강 간에 국제적으로 통상교섭이 되기는 미국이 처음이요"라는 표현이 일제강점기 잡지인 '개벽'(1934)에 나온다.

구한말이 제목으로 들어간 책이나 논문을 보면 구한말의 시작 지점이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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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태극기인 ‘데니 태극기’가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실 대한제국실에 전시되어 있다. 김혜윤 기자

[왜냐면] 이경수 | 강화도 주민

“그렇죠, 구한말에 그런 일이 있었죠.” 강의 중에 나도 모르게, 이렇게 말했다. ‘구한말’(舊韓末)을 쓰지 말아야겠다고 맘먹은 지 꽤 오랜데, 또 불쑥 튀어나왔다. 습관을 고치기가 참 어렵다. ‘나말여초’ ‘여말선초’처럼 구한말도 특정 시기를 구분하는 용어로 널리 쓰인다. 하지만 말뜻과 실제 쓰임에 괴리가 크고, 언제부터 언제까지를 가리키는지 규정되지 않아서 혼란스럽다. 특히 공부하는 학생들이 힘들어한다.

국어사전은 구한말을 ‘대한제국의 시기’라고 풀었다.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한 1897년부터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는 1910년까지 14년 동안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명쾌해 보이지만, 바른 풀이라고 할 수 없다. ‘말’(末)을 못 본 체하면서 구한말을 ‘구한국’과 똑같은 의미로 해석했기 때문이다. 구한말 한자어 자체의 의미는 ‘구한국의 말기’로 풀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대한제국이 탄생한 1897년부터 몇 년 동안은 이론상, 구한말이라고 부를 수 없다. 대략 1905년쯤부터라고 해야 논리적으로 문제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구한말이 구한국, 즉 대한제국 전체 시기를 의미하는 용어로 쓰이는 게 현실이다. “구한말과 구미 열강 간에 국제적으로 통상교섭이 되기는 미국이 처음이요…”라는 표현이 일제강점기 잡지인 ‘개벽’(1934)에 나온다. 윤치호가 쓴 글이다. ‘구한말과 구미열강’이라고 했다. 구한말을 구한국과 같은 의미로 쓴 것이다. 이유를 알 수 없는데, 이처럼 구한말과 구한국을 같은 뜻으로 사용한 이력이 꽤 길다. 이러하니, 국어사전만 탓하기도 어렵다.

구한국이라는 표현 자체도 꺼림하다. 일각에서 대한민국을 신한국으로, 대한제국을 구한국으로 설명하기도 하는데, 이는 잘못이다. 대한민국과 구별할 목적으로 대한제국을 구한국으로 부르는 게 아니다. 구한국이라는 용어는 대한민국 수립 이후가 아니라, 일제강점기부터 이미 쓰였다. ‘지금은 없어진’ 예전에 있었던 한국이라는 의미로 구한국을 썼다. 경술국치 관련 내용을 기록한 ‘순종실록’(1910)은 “한국의 국호를 고쳐 지금부터 조선이라 칭한다”고 하면서 한국, 즉 대한제국을 구한국으로 표기했다. 구한국이라는 용어를 처음 쓴 주체가 바로 일제인 셈이다.

아무튼 어색하고 불편하지만, 구한말을 대한제국 시기로 이해했다고 치자. 여기서 끝나는 게 아니다. 또 다른 문제점을 바로 인식한다. “구한말에 강화도는 병인양요(1866)와 신미양요(1871)를 겪었다.” “구한말에 조미수호통상조약(1882)을 맺었다.” 방송과 인쇄 매체를 통해 이런 표현을 어렵지 않게 접한다. 대한제국 성립 이전의 시기도 구한말로 보는 것이다. 구한말을 ‘조선 말기’쯤으로 인식한 것 같기도 하다. 구한말이 제목으로 들어간 책이나 논문을 보면 구한말의 시작 지점이 다르다. 어떤 이는 대원군이 집권한 1864년을, 어떤 이는 강화도조약을 맺은 1876년을, 어떤 이는 대한제국이 세워진 1897년을 구한말이 시작된 시기로 잡았다. 제목은 아니지만, 철종 재위기까지 구한말에 포함한 내용도 눈에 띈다. 사실상 글쓴이들의 임의적 판단이다.

구한말이라는 모호한 용어를 우리가 계속 써야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다른 식으로 얼마든지 시기 구분할 수 있다. 이를테면, 조선 말기·개항기·대한제국기 식으로 구분하면 될 일이다. 굳이 써야 한다면, ‘구한말(1876∼1910년) 유학생 관련 국내 연구 동향 검토’라는 논문 제목처럼 연대를 구체적으로 적어주는 것이 좋겠다. 그래야 독자들이 혼란을 겪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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