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파일] 투기에 이어 구기까지 침몰한 이유

권종오 기자 2024. 1. 24.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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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쿄올림픽 개회식에서 입장하는 한국 선수단

한국 엘리트 스포츠가 침몰 위기에 놓였습니다. 이미 일찌감치 국제 경쟁력을 상실한 투기 종목에 이어 단체 구기 종목마저 무너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는 7월 개막하는 2024 파리 하계올림픽 출전을 확정한 종목은 현재 여자 핸드볼뿐입니다. 1988년 서울 올림픽 이래 올림픽에 개근해 온 남자 축구는 4월 카타르에서 열리는 아시아축구연맹(AFC) 23세 이하 아시안컵에서 10회 연속 올림픽 본선 진출에 도전합니다. 나머지 단체 구기 종목은 사실상 전멸했습니다.

많은 인원이 참가하는 구기 종목이 무너지면서 대한체육회에는 비상이 걸렸습니다.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이후 가장 적은 선수들이 올림픽에 참가할 전망이기 때문입니다.

체육회 관계자들은 오랜 전부터 "올림픽 출전 선수 200명은 한국 스포츠의 자존심이자 마지노선이다. 만약 파리에 200명 이하의 선수를 보낼 경우 정부 예산으로 엘리트 선수를 육성하는 진천선수촌의 존재 의미가 퇴색하게 될 것"이라며 우려를 나타냈습니다. 이런 불길한 예상은 그대로 현실로 이어졌습니다. 이변이 없는 한 파리 올림픽에 출전하는 선수가 200명 이하가 될 것으로 예측되기 때문입니다.

지난해 올림픽 선전 다짐하는 대한체육회 소속 국가대표 선수들 (사진=연합뉴스)


최근 5개 하계 올림픽 대한민국 선수단의 선수 숫자를 살펴보면 단체 구기 종목 출전팀이 4개(여자 배구·핸드볼·하키, 남자 축구)에 불과했던 2016 리우데자네이루 대회가 204명으로 가장 적었습니다. 7개 팀이 출전한 2004 아테네, 2008 베이징 대회 때 선수 수(267명)와는 큰 차이를 보였습니다. 2021년에 열린 2020 도쿄 대회 때에도 6개 단체 구기 종목이 출전하면서 선수 수는 232명으로 2016 리우 대회 때보다 많았습니다.

한국 엘리트 스포츠는 1981년 9월 서독 바덴바덴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총회에서 1988 서울올림픽 유치에 성공하면서 '황금 시대'를 열기 시작했습니다. 올림픽에 사활을 걸었던 전두환 정권의 파격적인 지원 속에 경기력이 급성장하며 각종 국제 대회에서 무더기 금메달을 따냈습니다. 올림픽 금메달만 획득하면 속된 말로 '팔자를 바꿀 수 있는' 환경에서 선수들은 '죽기 살기'라는 마음으로 '지옥 훈련'을 묵묵히 감내했습니다.

하지만 2012년 런던 올림픽을 기점으로 한국 스포츠의 전반적인 경기력은 하강 곡선을 그리기 시작했고 2020 도쿄올림픽에서는 금메달 6개로 종합 16위에 머물렀습니다. 이번 파리 올림픽에서도 도쿄올림픽 이상의 성적을 내기는 쉽지 않은 상황입니다. 그럼 한국 엘리트 스포츠는 왜 침몰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일까요? 대한체육회 관계자들의 분석을 종합하면 이렇습니다.

1. 선수 자원 절대 부족


무엇보다 오랫동안 진행된 '저출산'의 여파로 선수 자원 자체가 과거에 비해 절대적으로 부족해졌습니다. 특히 자녀 1명을 둔 부모들은 가급적 운동을 시키지 않겠다는 경향이 강합니다. 선수 숫자가 적어지면 당연히 국가대표 경쟁률이 떨어져 재능이 뛰어난 우수 자원 확보가 어렵게 됩니다. 대한체육회 통계에 따르면 특히 농구와 배구 선수들이 크게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2. 강도 높은 훈련 기피

파리 올림픽 국가대표 선수단 해병대 훈련

이런 상황에서 경기력을 끌어올리려면 결국 강도 높은 훈련을 해야 하는데 선수들이 '인권'을 들고 나올 경우 뾰족한 방법이 없다고 합니다. 한 투기 종목의 경우 현 대표 선수들이 1980년대 국가대표 훈련량의 70%도 소화하지 못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현장에서 선수들을 가르치는 지도자들에 따르면 한국이 다른 나라 강호들을 압도하려면 당연히 빼어난 체력이 관건인데 훈련량이 뒷받침되지 못하면서 레슬링과 복싱이 차례로 무너졌다는 것입니다. 또 유도의 경우 그동안 기술만은 우리가 앞섰지만 지금은 다른 나라도 거의 근접해 성적을 올리기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3. 동기 부여 약화

항저우 아시안게임 대한민국 선수단

지난해 항저우 아시안게임에서 농구와 배구는 아시아권에서도 '2류'라는 사실이 다시 확인됐습니다. 농구와 배구는 프로 구단이 있는 종목입니다. 수억 원의 연봉을 받는 선수가 허다합니다. 국제 대회에서 메달을 딸 경우 받는 연금 혜택이나 포상금이 이런 고액 연봉자에게는 인생을 걸고 뛸 만한 수준이 되지 못하는 게 현실입니다. 국가대표 경기에서 열심히 하다 큰 부상이라도 당하면 엄청난 금전적 손해가 따르기 때문입니다. 결국 국내 경기에만 안주하면서 국제 경쟁력과는 아무 상관없는 '그들만의 리그'가 된 것입니다.
훈련하는 태권도 대표팀 (사진=연합뉴스)


역대 올림픽에서 한국의 메달밭이었던 태권도도 '종주국'이란 말이 무색할 정도로 약해졌습니다. 이번 파리 올림픽에 출전하는 한국 선수는 최소 3명, 최대 4명입니다. 국가별 출전 선수 제한 규정이 사라진 뒤 역대 최소 인원입니다.

올림픽 태권도 종목은 메달이 특정 국가로 쏠리는 것을 막기 위해 2012 런던 대회까지는 국가당 남녀 2체급씩, 최대 4명까지 출전할 수 있도록 제한됐고 2016 리우데자네이루 대회부터 체급당 한 명씩 최대 8명이 출전할 수 있게 됐습니다. 이에 따라 한국은 리우데자네이루 대회에 5명, 2020 도쿄 대회에 6명이 출전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많아야 4명이 올림픽 무대를 밟을 수 있습니다.

국내 체육계는 파리 올림픽이 향후 한국 엘리트 스포츠의 방향을 결정짓는 분수령이 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습니다. 만약 금메달 6개에도 미치지 못할 경우 "연간 4천억 원을 쓰고도 이것밖에 안 되느냐?"는 거센 비판에 직면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합니다. 아니면 "어차피 메달을 따지 못할 바에 이제 엘리트 스포츠 육성을 줄이고 생활 체육을 더 지원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질 수 있습니다. 이래저래 한국 엘리트 스포츠와 진천 국가대표선수촌의 운명이 파리 올림픽에 달려 있습니다.

권종오 기자 kjo@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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