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학점제’ 내년인데, 입시는 그대로…‘나만의 시간표’ 성공할까
‘갈매고등학교 2학년 9반 한수정’. 수정(18)의 지난해 2학기 학교생활을 설명하는 데 이런 소개는 별반 도움이 되지 않는다. 수정에게 2학년 9반은 아침 조회와 오후 종례 때 잠시 머무는 공간일 뿐이다. 수업은 매시간 다른 교실을 찾아다니며 들었다. 갈매고에 듣고 싶은 수업이 없으면 온라인 강의나 수업이 개설된 다른 학교에서 수업을 들을 수 있었다. 수정은 누구이며 어떤 고교 생활을 하는가는, ‘수정만의 시간표’가 더 잘 일러준다.
#월요일 1~2교시 공학 일반, 화요일 6~7교시 기하, 목요일 1~2교시 정보#
“공대 진학 정도만 생각하고 고교에 들어왔는데, 1학년 때 ‘아두이노’라고 전기회로랑 코딩을 연결하는 수업이 재밌어서 컴퓨터공학과에 가기로 결정했어요. 2학년 수업 시간표는 컴퓨터공학 진로에 맞춰서 짰고요.” 수정이 시간표에 담긴 자기 꿈을 설명했다. 수정이 다니는 경기 구리 갈매고는 2019년부터 ‘고교학점제’를 시범 운영했다. 해마다 학교는 학생 수요에 따라 필요한 과목을 개설한다. 학생은 대학처럼 과목을 골라 수강신청을 한 뒤 자기만의 시간표를 만든다. 교과별 교실을 돌아다니며 수업을 듣는다.
특별한 풍경은 아니다. 2025년부터 전국 고교에 고교학점제가 전면 도입된다. 이미 일반고 1600여곳(2023년 기준)이 고교학점제 연구·준비학교로 지정돼 학교에 따라 전면적으로 또는 부분적으로 고교학점제를 도입했다. 내년부터 고교생은 3년간 192학점(1학점은 50분 수업 16회)을 채워야 졸업할 수 있다. 필수 이수 학점(84학점)을 빼면 나머지는 저마다 진로·적성에 따라 골라 조합하는 선택과목이다. 고교학점제를 골자로 한 2022개정교육과정이 제시한 선택과목(보통교과 기준) 수만 200개가 넘는다. 온전히 시행된다면 한 반으로 모인 모두가 나란히 수업을 듣고, 같은 시험을 쳐 매겨진 석차에 연연하는 고교 시절은 사라지는 셈이다.
2017년 “고교교육의 패러다임 전환” “고교교육의 실질적 변화를 가져오는 촉매제”(‘고교학점제 추진 방향 및 연구학교 운영 계획’)를 공언하며 등장한 고교학점제가 전면 시행을 단 1년 남겨뒀다. 학교는 다만, 뒤숭숭하다. 고교학점제의 동력이 돼야 할 대학 입시 제도가 애초 정부 약속과 달리 큰 틀에서 변하지 않은 탓에 ‘무늬만 전환’에 그칠 것이라는 회의도 만만찮다.
한겨레는 연구·준비학교 등에서 고교학점제를 미리 경험한 학생 5명, 교사 4명과 대학 입학사정관 등 전문가들 이야기를 모아 고교학점제로 달라질 학교 풍경을 가늠했다. 이상과 현실, 불안이 교차했다.
진로: 209개의 시간표
지난해 2학기 어느 목요일, 수정은 1교시 307호 교실에서 ‘정보’ 수업을 듣는 것에서 시작해 7교시 220호 교실에서 ‘화학I’ 과목으로 이날 수업을 마쳤다. 같은 날 수정의 2학년 9반 친구 김수현(가명)은 1교시 401호 교실에서 생명과학I 수업을 듣고 운동과 건강, 윤리와 사상 수업을 들으며 하루를 보냈다. 갈매고 2학년 학생 209명이 자신만의 시간표로 하루를 보내기까지, 1학년 입학과 동시에 시작된 긴 고민이 있다. 진로와 그에 따른 과목 선택이다.
고교학점제를 시범 운영한 학교는 3~4월 고교학점제를 설명하는 ‘교육과정 설명회’를 연다. 과목 체계는 모든 학생이 필수로 들어야 하는 공통과목(필수 이수 학점)과 선호에 따라 골라 듣는 일반·진로·융합 선택과목(자율 이수 학점)으로 나뉜다. 선택과목 비중이 공통과목보다 더 크다. 대개 1학년 때 공통과목 학점을 많이 채우고 2학년부터 선택과목을 듣는다. 고교학점제 이전, 반마다 같은 시간표로 수업하되 사회・과학 영역과 제2외국어 교과군에서 주로 수능 선택과목에 따라 일부 교과만 구별해 듣던 수준과 차이가 크다.
5월 들어선 다양한 과목 특성과 진로에 대한 학교 수업과 안내가 시작된다. 7~8월 학생은 원하는 과목을 학교에 제시하고, 학교는 이를 바탕으로 수강신청 대상 과목을 확정한다. 이후 세 차례 수강신청을 받는다. 수정은 “친구들끼리 여기저기 모여서 고민을 엄청나게 했다”고 수강 신청 즈음 교실 분위기를 전했다.
고민의 핵심은 과목 선택의 바탕이 되는 진로 찾기다. 기본적으로 진로 교과 수업과 진로 교사 상담으로 구체화하는데, 실제 양상은 더 다양하다. 전북 전주 신흥고에서 고교학점제를 경험한 졸업생 박찬(19)은 “학교에서 변호사 등 여러 직업군을 초청해서 강연을 듣기도 했다”고 말했다. 갈매고 신한솔(19)은 “메타버스에 들어가서 선배들이 남겨 놓은 과목 후기를 보고 도움을 얻었다”고 했다.
고교학점제가 내년 전면 도입되면 현재 갈매고 같은 연구·준비 학교보다 더 나아가 ‘학점 이수제’가 졸업 요건이 된다. 과목별 성적이 이수 기준(학업 성취율 40%) 아래로 떨어지면 학점을 못 받는다. 이땐 방과 후나 방학에 보충지도를 받아 만회해야 한다. 이런 방식으로 3년간 192학점을 쌓아야 졸업한다. 여태껏 출석률 3분의 2 이상이란 양적 기준만 충족하면 졸업이 가능했다면, 학업성취율이란 질적 기준도 졸업 요건에 더해지는 것이다.
다양성: 열패감 옅어진 교실
진로를 정하고 나만의 과목을 조합한 뒤 졸업 학점을 맞추는 데 꽤 품이 들지만, 고교학점제를 미리 경험한 학생과 교사들은 그 효용성을 더 강조한다. 교실의 ‘열패감’이 옅어진 점이다.
갈매고에서 과학을 가르치는 김태호 교사는 “획일적으로 문제풀이 수업만 할 때는 (수능 기준) 3점짜리 고난도 문제를 가르치면 3등급 아래 학생들은 어차피 못 맞힐 문제라고 여겨 잠을 자거나 영어 단어를 외웠다”며 “학생 재능이 다르다는 이유로 공교육 3년간 열패감을 안긴 것”이라고 과거 교실을 기억했다. 그는 “고교학점제로 재능과 관심사를 살려서 수업했더니 20%만 수업을 듣던 데서 최소한 절반 정도는 수업에 참여한다. 절반의 참여는 학교 분위기 자체를 반전시키는 매우 큰 변화”라고 했다.
연구·준비학교 단계에선 진로 선택과목이 절대평가라 다양한 수업 방식과 자유로운 과목 선택이 가능했다. 서울 관악구 당곡고 재학생 김보임(18)은 “연극 과목을 들으면서 현역 배우한테 연기를 배워 상황극을 하고 각본도 써봤다. 수업을 듣다가 연기에 흥미를 느껴 그쪽으로 진로를 바꾼 친구도 있다”고 말했다. 수능 출제와 상대평가 등급이 중요했다면 연극은 선택받지 못했을 과목이다.
수정은 암기가 아닌 실험을 중심으로 구성된 공학 일반 과목에서 마시멜로와 이쑤시개로 다리 모형을 만들어 얼마큼 무게를 견딜 수 있는지 확인해 본 수업을 인상적인 경험으로 꼽으며 덧붙였다 “전에는 학교에 와서 앉아 있기만 하면 어떻게든 하루가 지나가겠지 했는데, 지금은 내가 원해서 택한 수업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생각이에요.”
불안: 어긋난 정책
고교학점제의 이점을 강조하는 교사들도 당장 제도가 완벽히 시행돼, 내년부터 모든 고교가 경쟁보다 개인의 성장이 중요한 공간으로 탈바꿈하리라 보진 않는다. 치밀한 진로 설계, 다양한 과목 개설에 따른 교사와 학습 공간 등 교육 자원, 미이수 학생에 대한 보충 수업 지도 등은 7년의 준비 기간에도 여전히 간단찮다. 전북 한 고교에서 고교학점제를 담당한 한 교사는 “교사 여력과 많은 자원이 필요하며 생각 이상으로 어려운 작업이라 포기하는 학교가 나올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고 말했다. 형식만 고교학점제를 따를 뿐 실제론 수능 대비 문제풀이 수업 등을 하는 경우도 많을 수 있다는 의미다.
여기에 정책 혼란이 더해졌다. 애초 고교학점제 모델은 선택과목에서는 절대평가만 적용하는 것을 골자로 했다. 교육부는 지난해 10월 ‘2028 대입제도 개편안’을 발표할 때 2025년부터 공통과목과 선택과목(일부 사회·과학 융합 선택 제외) 전체에 절대평가와 상대평가 성적을 내신에 병기하는 것으로 방향을 틀었다. 서울의 한 고교학점제 연구학교 교사는 “연구학교 단계에서 진로 선택 과목은 절대평가로만 점수를 주기 때문에 학생들이 흥미에 따라 심리학, 매체 미술, 음악 비평 등 독특한 과목도 골라 들을 수 있었다”며 “상대평가가 병기된다면 학생들은 내신 성적에서 유불리를 고려해 과목을 택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입시 때 점수 유불리를 따지느라 학생의 과목 선택 자유가 줄어든다는 의미다.
실제 학점제를 운용하는 해외 학교 사례를 보면, 미국은 A∼D 척도, 독일은 6등급 체계에서 1-15점수 방식까지, 차이는 있으나 모두 절대평가 한다. 이에 더해 정시(수능) 비중 유지, 대학 무전공학과 확대 등도 수능식 문제 풀이에 능숙한 학생에게 유리해 고교학점제와 어긋난다는 평가가 많다.
김성천 한국교원대 교수는 “고교학점제는 교육의 새로운 지평을 열 만한 변화이지만 상대평가와 높은 정시(수능) 비중이라는 현실 앞에서 학교가 어떤 철학을 지니느냐, 교육청의 지원이 얼마나 이뤄지느냐에 따라 학교와 지역별로 도입 양상이 달라질 수 있다”고 전망했다.
김민제 기자 smmer@hani.co.kr 박고은 기자 eun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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