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순 칼럼] 임금님이 벗었다는 건가, 입었다는 건가?
이진순 | 재단법인 와글 이사장
#1. 함정
가난한 나무꾼 앞에 산신령이 금도끼와 은도끼를 차례로 들고나와 묻는다. “이 도끼가 네 도끼냐?” 정직한 나무꾼은 망설임 없이 답한다. “아닙니다. 제 도끼는 쇠도끼입니다.”(동화 ‘금도끼 은도끼’)
영험한 산신령이라면 분실물의 실체를 몰랐을 리 없다. 애초부터 금도끼, 은도끼는 나무꾼의 사람됨을 시험하는 ‘함정’이었을 뿐이다. 대통령실과 국민의힘은 김건희 명품백 수수 의혹을 폭로한 ‘서울의 소리’ 보도가 함정취재, 몰카공작이라고 규정한다. 대통령실은 “치밀한 기획 아래 영부인을 불법 촬영한 초유의 사태”라며 분개했고, 친윤계 인사들은 ‘사기몰카’ ‘여성혐오’ ‘좌파에 의한 스토킹’ 피해자라며 김건희 여사를 엄호한다.
함정취재가 미덕은 아니다. 그러나 최재영 목사가 자신의 신분이나 실명을 속이고 접근한 것은 아니니 ‘공작’이란 용어를 갖다 붙이긴 어렵다. 어떤 뇌물이든 단호히 거부하는 모습이 영상에 찍혔더라면 정직한 나무꾼의 결말처럼 흐뭇한 미담으로 남았을지 모른다. 자신의 구린 구석이 탄로 나 망신살이 뻗친 욕심쟁이 나무꾼이 피해자 행세를 하는 건 어이없고 염치없는 일이다.
#2. 이름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 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김소월 시, ‘초혼’)
국민의힘 박대출 의원은 “법 이름부터 악법”이라며 ‘○○○ 특검법’은 “특정인 망신주기법이고, 심각한 명예훼손법”이라고 했다. 감히 입에 올리는 것조차 불경스러워 익명의 ○○○,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만 남았다. 한동훈 비상대책위원장은 “도이치 특검은 총선용 악법”이라며 그분의 이름 지우기에 앞장섰고, 윤재옥 원내대표는 “법명에 사람 이름을 붙이는 건 인권침해”라며 ‘김건희 특검법’이란 용어를 쓰지 말 것을 주장했다. 반려견에 관심 많은 김건희 여사 이름을 따서 ‘개 식용 금지법’을 ‘김건희법’이라 부를 때는 없었던 이야기다.
일부 언론은 ‘도이치 특검’이라고 받아쓰는 걸로도 모자라 ‘김 여사 특검’이란 해괴한 용어를 개발하기도 했다. 조선일보는 사설(1월6일치)에서 “김 여사 특검법은 민주당의 노골적인 총선 전략”이라고 했고 와이티엔(YTN), 세계일보, 이데일리 등도 ‘김 여사 특검법’이라고 불러대니 전국 수백만 김 여사들만 난데없이 뒤통수를 맞은 격이다. 서울시 서대문구와 송파구에서는 “김건희를 수사하라”는 진보당 펼침막을 철거했다. “김 여사를 수사하라”고 고치면 무사했을까?
자신의 가족 비리 의혹 특검법에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한 헌정사상 최초 사례로 기록된 이 법안의 정식 명칭은 ‘대통령 배우자 김건희의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의혹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검사 임명 등에 관한 법률안’이다. 김건희 특검이란 용어가 거슬린다면 애꿎은 독일이나 김 여사들 애먹이지 말고 차라리 앞글자를 따서 ‘대,배우 특검법’이라 하는 건 어떤가? 대선 전 “아내의 역할에만 충실하겠다”며 눈물로 머리를 조아린 김건희 여사의 모습을 기억하는 국민이 보기엔, ‘대배우 특검’이 어쩜 더 어울리는 명칭일지 모른다.
#3. 질문
“임금님이 벌거벗었어요!” 꼬마가 외치자 군중은 폭소를 터뜨렸다. 왕은 창피했고 그를 따르던 신하들은 당황했지만 체통 때문에 행진을 멈출 순 없었다.(안데르센 동화 ‘벌거벗은 임금님’)
지난 21일 대통령실은 한동훈 비대위원장의 사퇴를 요구했다. 한동훈 전 법무부 장관이 비대위원장직을 수락한 지 딱 한달 만이다. 22일 그는 사퇴 거부 의사를 재천명하며 말했다. “(김건희 리스크에 대한) 제 입장은 처음부터 한번도 변한 적이 없습니다.”
한번도 변한 적 없다는 그의 입장은 대체 뭔가? ‘민주당이 준비한 총선용 악법’이라며 김건희 특검법을 부정한 한동훈은, 김건희 명품 수수 의혹에 대해선 ‘잘 모르는 내용’이라고 회피하다가 ‘몰카를 이용한 정치공작’이라고 방어하다가, ‘국민 눈높이’로 볼 때 ‘걱정할 만한’ 사안이라고 한다. 그때그때 다르다.
윤석열 정부 최연소 국무위원이 되어 권력 2인자로 ‘임금님의 행렬’을 선도하던 그의 곤혹스러움도 이해는 가지만, 초지일관 내부개혁을 부르짖기라도 했다는 듯 결연하게 지사 흉내를 내는 건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다. 차라리,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여러 ‘동료시민’을 만나면서 생각이 바뀌었다고, 당을 대표해서 깊이 반성하고 국민께 사과드린다고 말하면 어땠을까? 이제라도 속 시원히 답해보시라. 임금님이 벗었다는 건가? 입었다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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