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끝작렬]김정은 연설에 등장한 '민족중흥'…개혁개방 없이 영원불가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선대의 유훈을 부정했다.
김 위원장은 이미 지난 2019년 10월 금강산 관광시설에 대해 "보기만 해도 기분이 나빠지는 너절한 남측시설"이라며, 아버지 김정일을 겨냥해 "선임자들의 잘못된 정책", "국력이 여릴 적에 남에게 의존하려 했던 선임자들의 의존 정책이 매우 잘못됐다"고 비판한 적이 있다.
그러더니 지난 1월 15일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에서는 할아버지 김일성의 대남정책도 정면으로 비판했다. 북한에서 김일성의 업적을 상징하는 '조국통일3대헌장기념탑'에 대해 '수도 평양의 남쪽 관문에 서 있는 꼴불견'이라고, 감정을 드러내면서까지 비판하며 '철거'를 지시했다.
김일성의 모든 것을 따라하던 김정은의 '돌변'
선대 수령들의 유훈을 부정할 수 있다는 것은 북한 내부에서 김 위원장에 대해 어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사람이 없다는 뜻이다. 장성택 일파의 숙청과 이복형제 김정남의 암살을 거치면서 김정은의 권력은 이미 절대화된 지 오래이다. 자신에 도전할 세력의 싹이 모두 제거되고 발아할 가능성도 없다는 점은 김정은이 피력하는 자신감의 첫째 이유일 것이다.
여기에 더해 핵 무력의 고도화로 전쟁 발발을 억제할 힘을 갖췄고, 미중 경쟁과 우크라이나 전쟁 속에 북한이 국제적으로도 중국·러시아와 더 연대할 수 있는 진영이 강화됐다.
김정은은 경제 전반에서도 "뚜렷한 생산 장성"을 이뤘다고 자랑했다. 연말전원회의 보고를 통해 2022년 대비 지난해 알곡 생산이 103% 증가하는 등 인민경제발전 12개 중요고지를 모두 '점령'했고, 이에 따라 2020년 대비 "국내 총생산액이 1.4배 늘어났다"고 주장했다.
코로나19 때문에 국경을 봉쇄하는 '제2의 고난의 행군'시기를 거친 김정은으로서는 사실 이런 대내외 상황 변화 속에서 자신감을 과시할 만하다.
김정은이 과시하는 자신감의 근거는 '허약'
통일연구원의 보고서에 따르면 북한의 주장대로 지난해 국내 총생산액이 2020년 대비 1.4배 증가하려면 2021년부터 23년까지 연평균 경제성장률이 11.9%는 되어야 한다. 그러나 2021년부터 북한의 국경이 봉쇄됐고, 22년부터 부분적으로 무역을 재개하기는 했지만 2019년 수준에 훨씬 못 미친다.
한국은행 통계에 따르면 북한의 경제성장률은 2020년 마이너스 4.5%, 21년 마이너스 0.1%, 22년 마이너스 0.2%의 역성장을 이어갔다. 코로나19 국경 봉쇄 기간 연 10% 넘는 성장을 했다는 주장을 믿기 어려운 이유이다.
다만 식량생산 증가는 일부 근거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농촌진흥청에 따르면 지난해 북한의 식량생산량은 480만 톤으로 전년에 비해 30만 톤 증가했다. 그럼에도 북한의 연간 수요량에 비춰볼 때 여전히 100만 톤 정도의 식량이 부족하다는 점에서 식량 상황에 크게 변화는 없는 셈이다.
북한은 핵 무력을 '국체', 즉 전략국가의 국가정체성으로까지 강조한다. 미국의 현실주의 국제정치학자 존 미어샤이머 시카고대학 석좌교수는 지난해 8월 통일부 주최의 국제포럼에서 북한의 핵 보유로 "한반도의 전쟁 발발 확률이 낮아졌다"고 평가한 바 있다.
북한이 핵을 보유한 상황에서 먼저 북한이 전쟁을 일으키지 않는 한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은 매우 낮아졌다. 북한 말로 한미에 대한 '전쟁 억제력'을 확보한 것이다.
북한이 자랑하는 핵의 이중성
그러나 북한의 핵은 딱 거기까지 만이다. 북한이 미국 본토를 겨냥한 전략핵, 한반도를 타격할 수 있는 전술핵을 갖춘다고 해도 핵은 실전에서는 사용할 수는 없는 '정치적 무기'이다. 핵 사용은 양측의 공멸이기 때문이다. 핵 무력을 고도화하면 할수록 효능은 멈추고 비용은 늘어간다. 북한의 국가 크기를 넘어서까지 핵무기를 계속 늘려가다 보면 어느 순간 핵을 안전 관리하는 비용만 배가된다. 그 때 핵은 적을 압도하는 '절대 무기'가 아니라 북한 사회의 발전을 가로막는 '불편한 무기'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다.
북한은 미국과 중국이 대립하고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와 전쟁을 하는 현 국제정세를 '신 냉전'으로 인식한다. 러시아에 무기를 팔고 첨단기술을 지원받는 등 러시아와 밀착함으로써 중국을 자극한다. 북·중·러 진영이라는 방패막이를 강화하기 위한 외교전이다.
그러나 전쟁이 무한정 계속될 수는 없다. 전쟁이 끝나면 러시아가 과연 어느 정도까지 북한의 효용성을 인정할지 불투명하다. 어느 국가도 국경을 접하고 있는 이웃 핵 보유 국가의 번성을 바라지 않는다. 러시아는 물론이고 중국은 더 하다. 90년대 고난의 행군 등 결정적인 시기에 외면했던 중국의 이중성은 북한 지도부가 더 잘 안다.
박정희의 '민족중흥' 김정은의 '민족중흥'
'민족중흥'은 다 알다시피 박정희 전 대통령이 이미 60여 년 전에 강조했던 말이다. 당시 학생들이 암기했던 '국민교육헌장'에도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이 명기되어 있다. 물론 김정은이 이번 연설에서 '민족중흥의 길'을 말하면서 박 전 대통령을 염두에 뒀을 가능성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다만 남한을 주적으로 규정하며 통일 논의를 중단하고 경제 건설에 박차를 가하겠다는 김정은의 구상은 경제발전을 당면 과제로 앞세우고 통일 논의를 미래로 유보하자던 박 전 대통령의 '선 건설 후 통일론'과 유사한 측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김정은이 최근 몇 년간 유달리 강조하는 '농촌발전계획'도 외면적으로는 박 전 대통령의 새마을 운동을 연상시킨다.
관건은 김정은이 제시한 '민족중흥'의 꿈이 과연 이뤄질 수 있는가이다.
김정은이 경제건설을 위해 내세운 무기는 '자력갱생'이다. 대북제재가 장기화되는 가운데 코로나19시기 국경까지 봉쇄한 상황에서 성과를 일부 도출한 방법이 바로 '자력갱생'이기 때문이다.
김정은은 시장 확산을 차단하고 내각 중심으로 경제를 재집권화하면서 북한 전체인민들의 정신력을 강하게 발동시키는 자력갱생으로 지난해 국내총생산액도 3년 전에 비해 '1.4배 늘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사상과 정신은 자력갱생이 작동될 수 있는 배경이다. 같은 민족인 남한을 주적으로 규정하며 선을 강하게 그은 것도 북한 인민들이 남한을 바라봐서는 정신력 발동이 어려워지기 때문으로 관측된다.
개혁개방 없이 '중흥'은 커녕 '3류국가'도 어려워
대북제재로 외부로부터의 재원조달이 막힌 상황에서 자력갱생은 난관을 돌파할 수 있는 주요 수단이기는 하다. 그러나 자력갱생은 너무나도 한계가 명확한 방법론이다. 북한 인민들의 정신력을 아무리 발동시켜도 개혁개방이 없는 한 경제와 민생은 지금보다 조금 더 나아지거나 현상유지, 오히려 퇴보할 뿐이다. 김 위원장이 꿈꾼 '중흥'은 결코 이룰 수 없다.
김 위원장이 꿈꾼 '민족중흥'의 시작은 점진적인 개혁개방일 수밖에 없다. 집권 초기에 김 위원장이 했던 대로 다시 시장의 자연스런 확산을 용인하고 경제영역에서의 물질적 유인을 늘리는 한편 대외적으로도 핵을 동결하고 외교로 돌아오는 것이 중흥의 시작이다. 그리고 대한민국이야말로 그런 '중흥'을 도울 수 있는 유일한 '동포'이다.
북한이 국내외에 핵 무력을 자랑하고 중국·러시아와의 진영연대를 근거로 말로는 '다극시대의 패권국가'를 자처할 수 있지만, 핵과 유엔제재 문제를 풀지 못하고 자력갱생에 머무는 한 북한의 미래는 체제 생존을 그럭저럭 이어나가는 '3류 국가'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김 위원장이 집권한지도 이제 12년이다. 불혹의 나이라고 하는 만 40세이다. 산과 강, 바다로 이어지는 곳에서 수천 년 역사를 함께 해온 공동체를 2개의 적대국가로 공식화하는 지도자의 비전으로 과연 무엇을 이룰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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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BS노컷뉴스 김학일 기자 khi@c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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