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입자에게 더 추운 겨울…집도 세탁기처럼 에너지등급 보고 고른다면[올앳부동산]
해외선 임차시장 에너지효율등급 공유 의무
#A씨는 지난 해 반전세로 25평 오피스텔을 구했다. 그럭저럭 만족하고 살던 이 집에서 큰 하자를 느낀 건 지난 가을 무렵부터다. 겨울이 시작되기 전인데도 온종일 집에 냉기가 돌았다. 보일러를 틀어놓지 않은 어떤 날은 집안 온도가 영하 11도까지 떨어졌다. 문풍지와 뽁뽁이로 촘촘하게 창문 구멍을 막아봐도 소용이 없었다. 자비로 부른 보일러와 배관 업체들은 건물바닥에 단열재가 제대로 깔리지 않은 것 같다고 귀뜸해줬다. 내 집이 아닌만큼 집주인에게 수리 비용을 내달라고 해봤지만, ‘보일러를 빵빵하게 틀라’는 대답만 돌아왔다. 결국 가스비가 11월 35만원, 12월 42만원으로 감당할 수 없이 치솟았다.
국내 건축물에너지등급 제도
20년간 주택 인증건수 4000건 머물러
세입자들이 집을 구할 때 샷시나 도배 정도는 확인할 수 있지만, 바닥과 벽면의 단열재 시공까지 엄밀하게 따지기는 쉽지 않다. 외관상 깨끗한 집이라도 살면서 결로와 곰팡이로 애를 먹는 경우도 많다. 특히 부실한 단열 시공 탓에 난방이 안되는 경우는 더 큰 문제다. 추워서 보일러를 오래도록 세게 틀어놓으면, 매달 난방비 폭탄을 맞을 수 있기 때문이다. 50만원짜리 에어컨을 살 때도 에너지 등급을 꼼꼼히 따져서 고르는데, 수억원대 목돈이 들어가고 최소 2년은 살아야 하는 주택은 에너지 효율을 왜 먼저 확인할 수 없을까.
국내에도 건축물 에너지 등급 제도가 있긴 있다. 2001년 도입된 건축물 에너지효율등급 인증 제도는 주택 에너지 소비량을 숫자로 환산해 등급을 주는 방식이다. 대상은 냉·난방 면적이 500㎡ 이상인 건축물, 연면적 3000㎡ 이상 신축 및 별동 증축 건축물 등이다. 가장 에너지효율이 높은 순으로 1+++, 1++, 1+, 1~7등급 등 총 10단계로 등급이 나뉜다. 1등급 이상은 취득세, 재산세 감면 등 인센티브가 주어진다.
하지만 제도가 도입된 지 20년이 지났지만 인증을 받은 건축물 숫자는 많지 않다. 1월 19일 기준 등급 인증을 받은 주거시설은 전국 4033건, 서울 1425건에 그쳤다. 2005년부터 2022년까지 서울에서 건축허가(증축·개축 포함)를 받은 주거용 건물이 약 9만동이라는 걸 감안하면 에너지등급 인증 실적은 저조하다. 이같은 현상은 인증 체계가 신축에 초점이 맞춰져 기존 건축물에 대한 인증 평가가 어렵고, 냉·난방 면적 500㎡ 미만 소규모 건축물은 인증 의무 대상에서 빠진 게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건축물이 에너지 효율 등급을 받았더라도, 임차인이 등급을 확인해서 집을 고르는 건 말처럼 쉽지 않다. 집주인이 세입자에게 등급을 알려줄 의무가 없기 때문이다. 에너지 등급을 공유하는 게 일반적인 해외 임대차 시장에선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영국은 주택을 임대하거나 팔 때 에너지효율등급(EPC) 서류를 중개 시장에 공유해야 한다. EPC는 에너지 효율이 높은 순으로 A~G등급으로 구분되는데 영국 정부는 2020년부터 E등급 미만 임대주택의 임대차를 금지하고 있다. 일본도 판매·임대가 이뤄지는 모든 건축물에 에너지 절약 성능을 표시해야 한다. 독일 역시 세입자가 집을 구할 때 에너지효율등급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고 한다.
중개사가 에너지효율 등급 공개를 의무화한다면,
집주인 난방효율 높이는 자발적 노력할 수도
최근 국회와 시민단체에서는 임대차 시장에서 주택 에너지효율등급을 확인할 수 있도록 하는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입법 연구기관 공익허브가 만든 ‘임대주택 에너지효율등급 표시제’가 대표적인 예다. 이 정책은 임대차 계약을 할 때 공인중개사가 건축물 에너지효율등급을 임차인에게 설명하고, 그 근거자료를 의무적으로 제시하도록 하는 게 골자다. 공익허브는 “임대주택의 에너지 효율성을 임대차 시장에서 투명하게 공개하면 임차인이 주택 냉난방 효율을 미리 알 수 있어 에너지 효율이 낮은 주택을 피할 수 있다”며 “임대인이 자발적으로 주택 에너지 효율을 관리하도록 유도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임대주택 에너지효율등급 표시제는 단순히 임차인이 좋은 집을 고르게 하는 것을 넘어, 2050년 탄소중립 실현에도 도움을 줄 것으로 보인다.
건물부문의 온실가스는 석탄, 석유, 도시가스처럼 건물 내부에서 연소시켜 에너지를 얻는 직접 배출, 그리고 전력과 같이 건물에서 내뿜는 간접 배출로 구성된다. 구체적으로는 난방·냉방·급탕·조명·환기 에너지가 있는데, 단열을 강화하고 창호를 바꾸기만해도 냉난방에 들어가는 에너지를 크게 낮춰 전반적인 온실가스 감축 효과가 생긴다.
그간 임차 주택은 온실가스 감축 등 에너지 효율 작업이 더디게 진행됐다. 김유민 한국건설기술연구원 수석연구원은 2021년 보고서에서 “임차인은 비용 투자를 할 이유가 적고, 임대인은 성능개선을 통한 직접적인 자산가치와 임대료, 임대율의 상승 등을 기대하기 어려운 경우 (에너지 효율을 위한) 투자를 꺼리게 된다”고 말했다. 임대주택 에너지효율등급 표시제가 도입돼 에너지 등급이 임대차 시장에서 공유되면, 임대인이 임차인을 구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에너지 효율을 높여 건물 온실가스 배출을 낮출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건축물 탄소배출량 매년 증가
정부는 제로에너지 인증 유예하며 탄소중립 시나리오 역행
업계에선 에너지효율 등급을 사실상 1회성으로 받는 현 제도를 보완하는 게 병행돼야 한다고 말한다. 이은형 대한건설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건축물은 일반적으로 처음 만들 때는 에너지 효율 기준을 대부분 충족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창틀이나 창호가 뒤틀리고 바람이 새면서 난방 효율이 떨어지는 상황이 된다”며 “에너지효율 등급 공유가 의무화하더라도 신축 때 받는 현 구도 하에서는 노후 건물의 에너지효율을 정확하게 판단하는 데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에너지효율등급 표시제를 확대 운영하는 것에 정부는 미온적일 수 있다. 최근 정부는 부동산 시장 경색으로 위기에 몰린 건설업계의 부담을 최대한 덜어주는 쪽으로 정책을 운용하고 있다. 이런 시각에서라면 에너지효율등급 표시제는 규제일 뿐이다.
기획재정부와 국토교통부는 당초 올해부터 아파트를 지을 때 적용하려던 ‘제로에너지 건축물(ZEB) 인증 의무화’ 제도도 1년 유예하기로 결정했다. 건축물에 필요한 에너지 사용을 최소화하고 신재생에너지를 활용하는 ZEB가 도입되면 건축 단가가 높아진다는 건설업계 불만을 받아들인 것이다. 이를 두고 건설업계 일부를 위해 탄소배출 감축이란 시대적 과제를 희생시켰다는 비판이 나왔지만 정부는 요지부동이었다. 이런 식이라면 2050 탄소중립 목표는커녕 2030년까지 탄소배출량을 2018년 대비 약 40% 감축하겠다는 계획도 수정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건축물은 국내에서 세번째로 온실가스 배출량이 많다. 배출량도 전체 24.7%를 차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몇년간 건축 부분의 배출량은 증가하면서 탄소중립 시나리오에 역행하고 있다. 지난 4일 정부가 발표한 ‘2022년도 탄소중립·녹색성장 이행점검 결과’를 보면 2022년 온실가스 총 배출량은 잠정 6억5450만t으로 전년 대비 3.5% 감소했는데 건물부문은 4830만톤을 배출해 전년(4690만톤)에 비해 오히려 3.0% 증가했다.
윤지원 기자 yjw@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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