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의 시계…기업의 시간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등 삼성 전현직 임원들이 기소된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과 관련한 자본시장법 위반 사건 1심 선고가 오는 26일에서 내달 5일로 미뤄졌다.
1010일(2024년 1월26일 기준)간 진행된 재판이니 열흘 정도 더 미뤄진다고 대수냐고 하겠지만 당사자들은 하루가 여삼추(一日如三秋)다. 하루를 3년 같이 또 열흘을 기다려야 1심 선고가 나고, 2심(항소심)과 3심(상고심)까지는 또 몇년이 걸릴지 모른다.
구광모 LG 회장과 모친인 김영식 여사 등 LG 모자간 상속소송도 마찬가지다. 내달 28일이면 벌써 1년이다. 하지만 지난 1년간 실제 변론기일은 이틀에 불과했다. 첫 변론 전에 진행한 변론준비기일과 이달 23일 진행한 비공개 변론준비기일까지 치면 1년에 원고와 피고측이 네번 만났지만, 옳고 그름을 다투는 시간은 짧았다.
결론 없이 지나온 1년 동안 기업은 '소송'이라는 변수로 인해 유무형의 손실에 노출됐다. 재판이 열리지 않는 시간동안 법원 밖에서는 해외언론 등을 동원한 여론의 법정을 열고 '강자와 약자'의 프레임으로 여론전을 펼치기도 했다. 게다가 2월이면 또 법관 인사철이어서 재판부가 바뀌면 사건에 대해 다시 숙지해야 하니 또 재판이 늘어질 수밖에 없다. 이런 것들은 모두 기업에게는 손실이다.
대한민국 헌법 제27조 제3항에는 '모든 국민은 신속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고 돼 있다. 소송촉진 등에 관한 특례법 제21조(판결 선고기간)에는 판결의 선고는 제1심에서는 공소가 제기된 날부터 6개월 이내에, 항소심 및 상고심에서는 기록을 송부받은 날부터 4개월 이내에 하여야 한다고 돼 있다.
민사소송법 제199조는 법원으로 하여금 민사사건이 접수된지 5개월 이내에 종국판결을 내리도록 하고 있다. 재판지연을 통해 원고든 피고든 시간이 낭비되는 것을 줄이려는 취지지만 사실상 이런 법조문은 유명무실하다.
세계사법정의프로젝트(World Justice Project)의 조사에 따르면 대한민국의 재판처리 속도는 조사대상 142개국 중 민사소송 10번째, 형사소송 4번째로 빠르다. 하지만 부족한 법관들과 몰리는 사건들로 인해 2010년대 이후로 재판지연 현상이 심화되고 있는 것은 엄연한 현실이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소중하다. 뉴턴의 고전물리학에서 시간은 누구에게나 절대가치로서 공평하게 주어진다고 믿었지만, 아인슈타인의 현대물리학에서의 시간은 서로 상대적인 것이 됐다. 누구에게는 빠르게, 또 누구에게는 느리게 가는 게 '시간'이다.
기업의 시계는 재판부의 시계보다 훨씬 빠르게 흘러간다. 기업은 매일, 매월, 매분기, 매년 스스로의 성과를 보여주고 그 결과로 심판받는다. 분초를 다투는 일이 허다하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빛의 속도로 변하는 세상의 변화에 맞춰갈 수가 없다.
반면 재판부는 누군가를 심판하는 자리다. 빠른 것보다는 정확한 게 우선시될 수밖에 없으니 법원의 인력 부족으로 늘어지는 재판을 무작정 탓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최근 부임한 조희대 신임 대법원장도 취임 일성으로 재판지연 해소에 대한 문제를 거론하고, 법관 인사 주기를 2년에서 3년으로 늘리는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한다. 또 천대엽 법원행정처장도 인공지능(AI)과 같은 사법 서비스의 획기적 개선 방안을 통해 재판지연을 줄여나갈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전세계를 무대로 싸워야 하는 기업에게 시간은 '돈'보다 훨씬 더 중요한 가치다. 말한마디 하지 않고 8시간 이상 법정에 앉아 있는 것도, 몇달 동안 재판도 없이 소송의 원고와 피고에 이름을 올려놓고 있는 것도 줄여야 한다. 법에 의해 옳음과 그름을 판단받아야 하는 무대 위에 서는 시간도 최대한 짧은 것이 좋다. 그 시간을 경제 전쟁터에서 보내는 게 훨씬 더 생산적이다. 그러기 위해선 법원의 재판지연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시스템 변혁이 필요하다.
오동희 산업1부 선임기자 hunter@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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