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시각] 요란한 빈 수레, ‘수퍼 선거의 해’

김나영 기자 2024. 1. 24.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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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월 21일 미국 뉴햄프셔주 로체스터에서 공화당 대선 후보이자 전 대통령인 도널드 트럼프의 집회를 앞두고 로체스터 오페라 하우스 밖에서 선거용 셔츠와 모자가 판매되고 있다. /AFP 연합뉴스

낙관주의자들은 올해를 축제의 해로 전망했다. 약 50국이 크고 작은 선거를 치르면서 지구촌 인구의 절반이 한 표를 행사하게 된다는 사실이 알려졌기 때문이다. 언론은 올해를 ‘수퍼 선거의 해’라고 부르며 그 의미를 조명했다. 흔히 선거를 민주주의의 꽃으로 비유한다. 이 표현을 빌리면 올해는 세계에서 꽃 약 40억송이가 만개하는 셈이다. 얼핏 향기롭고 찬란한 심상이 코끝에 닿는 듯 보인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영국 시사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흥겨운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듯 서늘한 경고를 보낸다. 오히려 지금은 민주주의가 위협을 받고 있는 시기라고 말이다. 이코노미스트 인텔리전스 유닛(EIU)은 매년 2월 전 세계 국가들의 민주주의 상태를 평가해 ‘민주주의 지수’를 발표한다. 지난해 이 지수의 평균 수치는 10점 만점에 5.29점. EIU는 “2016년 시작된 민주주의 불황기를 반전하지 못했고 오히려 침체를 의미한다”고 짚었다. 결국 ‘수퍼 선거의 해’는 크고 요란한 빈 수레인 셈이다.

민주주의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는 사회에서 선거는 요식행위로 전락하거나 갈등의 기폭제가 된다. 실제로 오는 3월 대선을 앞둔 러시아에선 푸틴의 재선이 확실시되고 있으며, 인도도 4월 총선에서 반무슬림을 내세우는 나렌드라 모디 총리의 임기가 연장될 것으로 보고 있다. 미국 민주주의 역사에서 초유의 사태로 불리는 1·6 의회 폭동을 방조한 혐의로 기소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유력한 차기 대선 후보다. 재니 민턴 베도스 이코노미스트 편집장은 “트럼프의 출마 자체가 미 민주주의가 훼손됐다는 증거”라고 했다. 튀르키예는 지방선거를 앞두고 가상 사설망(VPN)을 차단하면서 디지털 공간에서 시민 자유를 억압하고 있다. 이 밖에도 일일이 거론하기엔 너무나 많은 국가가 암울한 현실에 놓여있다.

국내 상황도 비슷하다. 한국은 EIU 지수에서 지난해 대만과 나란히 ‘결함 민주주의’에서 ‘완전 민주주의’로 올랐지만 마냥 자화자찬할 순 없는 노릇이다. 오는 총선을 앞두고 제1 야당 대표가 습격을 당했고, AI 댓글을 활용한 여론 조작에 대한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 정치권만의 문제가 아니다. 마녀사냥으로 인한 유명인 자살은 잊을 만하면 반복된다. 외신은 고(故) 이선균 배우의 비보를 전하면서 악성 댓글과 사이버 불링을 한국 사회의 문화로 소개했다.

미 스탠퍼드대 콘돌리자 라이스 후버연구소장은 “오늘날 민주주의가 성공하려면 스스로의 결함과 모순, 특히 온라인 에코 챔버에서 증폭된 사회 분열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했다. 공동체가 쪼개지는 상황에서 선거라는 정해진 절차만 따라서는 진정한 민주주의를 이룰 수 없다는 뜻으로 읽혔다. 100년 뒤 역사는 올해를 어떻게 기억할까. 그저 조용히 퇴보하고 있는 상황은 아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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