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로] ‘성난 사람들’ 성공의 진짜 이유

김태훈 논설위원 2024. 1. 24.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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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적인 이야기가 통했다”고?
인간의 분노라는 보편적 현상을
서구 문화 연구해서 표현한 게
그들에게 박수받은 진짜 이유
미국 최고 권위의 에미상 시상식에서 감독상과 작품상, 남녀 주연상 등 8개 부문을 휩쓴 넷플릭스 시리즈 '성난 사람들'의 한 장면. /넷플릭스

넷플릭스 드라마 ‘성난 사람들’이 에미상 8개 부문을 석권하자 국내 일부에서 ‘한국적인 이야기가 통한 결과’라고 분석했다. 드라마에 한국적인 요소가 많은 것은 사실이다. 감독과 배우 여럿이 한국 출신 미국인이다. 라면과 떡볶이, LG전자, 대한항공, 한인 교회도 나온다. 주차장에서 경적을 울리며 시작된 사소한 시비가 숨 막히는 복수극으로 치닫는 ‘성난 사람들’은 흡인력 강한 드라마다. 필자도 지난해 나오자마자 10부작을 몰아보기로 주파했다. 그러나 한국적인 것에 끌렸기 때문은 아니었다. 이성진 감독도 말했듯, 그 드라마에서 한국적인 디테일은 이야기의 사실성을 높이기 위한 소품일 뿐이다. 드라마에 빠져든 것은 그토록 쉽사리 분노의 감정에 굴복하는 두 주인공에서 거울로 내 마음을 비춘 것 같은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 드라마엔 할리우드가 동양 스토리를 다뤄 온 익숙한 패턴이 나오지 않는다. 이민자의 정체성이라든가 인종차별 같은 테마도, 주인공에게 애매한 조언을 날리는 멘토나 무술 고수 캐릭터도 볼 수 없다. 동양인이 비중 있는 역할로 나와 지금껏 서양 배우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메인 스토리를 맡았다. 남자 주인공 대니는 가난한 도급업자다. 한국에 있는 부모와 끈끈한 정을 나누지만 손대는 일마다 실패해 여러 번 죽을 생각을 한다. 여주인공 에이미는 화분 사업으로 성공했지만 그러느라 딸을 방치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고, 남편이나 거래처와는 겉도는 인간관계에 환멸을 느낀다. 사는 모습은 달라도 삶의 무게에 짓눌린 채 결핍감에 신음한다는 데서 둘은 같은 처지다. 고슴도치처럼 상처를 감싸고 웅크렸다가 누군가 건드리면 폭발하듯 가시를 뻗어 공격하는 행태도 같다.

‘성난 사람들’은 ‘분노하는 인간’이란 주제를 탐색하는 과정에서 시청자에게 신화와 고전, 현대음악을 아우르는 풍성한 문화 향유 경험을 선사한다. ‘결핍이 분노를 부른다’는 문제의식은 고대 로마 시인 오비디우스의 서사시 ‘변신 이야기’에 나오는 ‘유노의 분노’와 연결된다. 여신 유노는 바람둥이 남편 유피테르가 인간 여자와 동침한 것을 처음엔 못 본 척 넘기지만, 여자가 임신하자 결핍감에 빠져든다. “네가 은밀한 정사로 만족했다면 내 결혼 침대에 영향을 미치지 못했을 거야. 하지만 임신까지 했어. 그런 일은 내게도 아직 일어나지 않았는데”라며 분노에 휩싸여 여자에게 죽음의 벌을 내린다.

대니가 자신의 풍요를 부러워하자 에이미는 “영원한 것은 없고, 모든 것은 사라져”라며 “인간은 자기 꼬리를 먹는 뱀일 뿐”이라고 한다. ‘겉보기엔 성공했지만 그러느라 자기 삶을 갉아먹었다’는 에이미의 자각은 그리스 신화 속의 뱀 우로보로스 이야기에서 비롯됐다. 1990년대 결성된 록밴드 후바스탱크의 히트곡을 들려주고 실비아 플라스의 시를 읊으며, 저명한 20세기 미국 소설가 조지프 헬러의 소설 이야기로 수다도 떤다. 사투를 벌인 끝에 서로의 몸속에 들어가 내면을 들여다보는 환상적인 경험 끝에 두 사람은 ‘그토록 미워했던 이가 또 다른 나였다’는 깨달음에 이른다. 지난해 봄 드라마가 공개되자 미 ABC 뉴스는 “에미상을 잘 닦아 놓으라”며 일찌감치 수상을 예고했다. 서구의 오랜 문화적 축적을 탐색하고 솜씨 좋게 버무리느라 애썼을 동양인 감독과 배우들의 노고를 알아본 것이다.

드라마 10화의 제목은 ‘빛의 형상’이다. ‘깨달음은 빛의 형상을 상상하는 게 아니라, 어둠을 알아차림으로써 온다’는 스위스 심리학자 카를 융의 글에서 따왔다. 이성진 감독도, 주인공을 맡은 스티븐 연과 앨리 웡도, 동양인에게 익숙한 스토리와 할리우드가 강요하는 반복된 역할에서 벗어나는 모험을 택했기에 에미상의 가장 높은 곳에서 빛날 수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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