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이드&인사이트]“엄근진 그만, 좀 웃자”… 무대 위 부는 블랙코미디 바람

이지윤 문화부 기자 2024. 1. 23. 2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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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계, 잇따르는 희극 작품
이지윤 문화부 기자
《가상의 중앙아시아 신생 자립국 치르치르스탄. 2차전지의 원재료인 리튬을 팔아 돈방석에 앉은 왕정국가다. “국가가 정하면 국민은 따르는 것”이라며 국민 문화 진흥을 위한 총사업비 3조 원 규모 사업의 전 세계 입찰 경쟁을 추진한다. 한국에선 국립현대극장(NCT)의 김민식(民食) 팀장이 ‘K신파’를 들고 입찰에 뛰어든다. 최종 후보로 한국의 신파극과 K팝, 브라질의 삼바 등이 경쟁을 펼친다. 그중 가장 강력한 경쟁자는 다름 아닌 대형 K팝 기업. 기업 담당자는 김 팀장에게 3년 치 사업비를 주는 대신 입찰 포기를 권유하며 이렇게 말한다.

“우리도 오래가진 않을 거예요. 가사는 영어로, 가수는 외국인으로 바뀌고 있죠. 이번 건은 우리가 맡고, 돈 줄 테니 극장 이름은 ‘SM남산예술극장’ 같은 걸로 바꿔줘요.”》




2018년 미투 사태와 팬데믹의 직격탄을 맞아 어둡고 진중한 작품 위주로 공연됐던 극장가에 희극이 돌아오고 있다. 연극 ‘신파의 세기’는 오늘날 문화 정책 및 산업에 대한 문제의식을 블랙코미디 어법을 통해 관객에게 유머러스하게 전달한다. 서울문화재단 제공
지난해 11∼12월 서울 종로구 대학로극장 쿼드에서 초연된 연극 ‘신파의 세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제59회 동아연극상 희곡상 수상자인 정진새(44)가 극작과 연출을 맡은 작품이다. 극중극 형식으로 국가주의적 문화 정책부터 상업성에 빠져 K자만 붙이기 급급한 문화 산업까지 풍자한다. 극 중 외국인으로 구성된 ‘신파 트리오’가 K영화인 ‘명량’ ‘국제시장’ 등을 비틀어 우스꽝스럽게 패러디하는데 ‘명량’의 이순신 장군 역엔 튀르키예 출신 배우 베튤이 캐스팅되는 등 황당한 설정으로 웃음을 유발시킨다.

“인생은 가까이 보면 신파, 멀리서 보면 컨템포러리”, “이 나라에선 작품 열 개 만들면 아파트 한 채 빚이 생긴다” 등 대사가 나올 때마다 객석에선 쓴웃음이 터져 나왔다. 연극을 관람한 김은미 씨(40)는 “블랙리스트 사태 등을 겪은 공연계에선 최근 몇 년간 악쓰고 침울한 작품 위주로 공연됐다. 연극을 보고도 행복하기보단 찝찝한 기분을 느낄 때가 많았다”며 “최근 들어 적절한 유머를 가미한 작품이 연달아 무대에 올라 공연 보는 맛이 더욱 생겼다”고 말했다.

● 젊은 창작진 손 거친 희극 줄줄이 무대에

최근 블랙코미디 등 유머 코드를 강화한 연극, 뮤지컬이 잇달아 무대에 오르고 있다. 2016년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2018년 미투 사태 등 질곡을 정면으로 겪은 공연계가 수년간 엄숙하고 진지한 작품 위주로 공연해 온 것과 대비되는 분위기다.

최근에는 소극장 이외에 굵직한 공연 제작사까지 희극 제작에 발을 들이는 중이다. 뮤지컬 ‘헤드윅’ ‘멤피스’ 등을 만든 제작사 쇼노트와 낭만바리케이트는 올해 9월 뮤지컬 신작 ‘번 더 위치’를 공동으로 선보인다. 중세시대의 마녀와 오늘날 슈퍼스타가 만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통해 마녀사냥 문제를 비춰 보는 블랙코미디다.

다음 달 1∼3일 두산아트센터에서 공연되는 연극 ‘명태 말고 영태’는 언어유희와 판소리 재담 형식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재미를 더했다. 1990년생 김민주 연출가가 극작과 연출을 맡았다. 보관 방법과 서식 환경 등에 따라 이름이 가지각색으로 변하는 생선 명태를 통해 베이비붐 세대의 애환을 풀어내고 ‘세대가 만들어낸 시대가 아닌, 시대가 만들어낸 세대’를 꼬집는다. “영태는 노가리 때부터 머리가 좋아 금태로 소문났지만 집안이 궁태해 끌태 되어 끌려가는 진퇴양난의 모양새” 등의 대사는 웃음을 유발한다.

풍자극 ‘케이맨즈 랩소디’의 한 장면. 드림플레이 테제21 제공
대학로 소극장에서 공연되던 희극이 인지도 높은 극장으로 자리를 옮기기도 한다. 일제강점기부터 2016년 강남역 살인 사건에 이르기까지 ‘한남’들이 등장해 한국의 남성성을 풍자적으로 꼬집는 연극 ‘케이맨즈 랩소디’는 기존 서울 종로구 선돌극장에서 두산아트센터 스페이스111로 자리를 옮겨 4월 6일부터 재연된다.

● 미투 등 ‘트라우마’ 옅어지며 희극 기지개

그동안 희극이 잠잠했던 건 블랙리스트, 미투 등 이후 창작자들 사이에서 ‘웃기기 자제’ 경보가 울린 것과 관련된다. 한 극작가는 “10년 전과 비교해 웃음을 겨냥한 작품이 절반 이하로 줄었다고 체감한다. 미투 이후 웃음이 혐오에 기인했다는 자성이 이뤄졌고 굳이 위험을 감수하지 않으려는 부담감이 커진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몸을 사리던 희극이 왜 다시 기지개를 켜는 걸까. 엄현희 연극평론가는 “각 파동 직후엔 관련된 작품을 만드는 것도, 보는 것도 녹록지 않았지만 시간이 흘러 창작진과 관객 모두 사안을 침착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됐다. 그 여유를 바탕으로 풀어낸 방식이 풍자극”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팬데믹 기간엔 직격탄을 맞은 공연계가 비극적 작품을 쏟아내 피로감이 쌓였고, 그 반대급부로 희극이 주목받은 영향도 있다”고 분석했다.

과거에 비해 자유로워진 창작 및 제작 환경도 풍자극이 늘어나는 데 영향을 미친 것으로 풀이된다. 한 국공립 공연단체 관계자는 “정치 사회적으로 예민한 이슈를 다루는 공연이 공동기획 작품이거나 제작비 대부분을 공기관에서 지원하는 작품이라고 할지라도 ‘톤을 조정해 달라’고 요청하는 게 사실상 불가능하다. 블랙리스트 사태 여파로 작품 수정 요구는 예술가에 대한 갑질이자 국가의 검열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 특정 소재 대상화 아닌 회차·의외성 살려 웃기기

풍파를 지난 공연계에 남은 숙제는 문화계의 화두로 떠오른 ‘PC(political correctness·정치적 올바름) 논쟁’이다. 편집 기술이 있는 영상매체와 달리 불특정 관객에게 낙장불입의 농담을 던지는 공연계는 ‘포용’을 기치로 대처에 나섰다. 서울시극단 단장인 고선웅 연출가는 “20년 전 내가 쓴 극본을 보고 깜짝 놀랄 때가 있다. 예전엔 관행처럼 사용하던 ‘예쁘장하다’ 등 표현을 이젠 쓰지 않는다”며 “PC가 화두가 되면서 배우, 스태프, 기획팀까지 머리를 맞대 최대한 다양한 인식을 끌어안으려 노력한다. 연극은 관객과 나누는 동시에 수많은 창작진이 책임을 나누는 공공재적 예술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손정우 한국연극협회 이사장은 “과거 원색적인 소재와 대사로 다뤄지곤 했던 젠더, 장애, 종교, 인종 등은 더 이상 웃음거리가 될 수 없다. 미투 등을 거치며 연극계 역시 치열한 학습을 했다”고 말했다. 직장인 윤나라 씨(27)는 “연극에서 비윤리적인 농담이 나올 때마다 전혀 웃기지 않고 불편했다. 그런 대목이 언제, 어디서 튀어나올지 몰라 4∼5년 전만 해도 코믹함이 담긴 연극을 보는 게 꺼려졌는데 이젠 그 지뢰가 줄고 선택지는 넓어진 느낌”이라고 했다.

이에 특정 소재를 대상화하기보단 공연 고유의 다양한 속성을 적극 활용해 희극의 가능성을 넓히고 있다. 3월 21∼23일 두산아트센터에서 초연되는 연극 ‘문병재 유머코드에 관한 사적인 보고서’는 공연만이 가진 현장성과 서사의 의외성을 웃음코드로 활용한다. 한때 자타가 공인하던 ‘웃음 사냥꾼’ 문병재가 세월이 흐르면서 ‘웃음 장례식’까지 치르는 여정을 따라가는 작품이다. 1997년 외환위기와 2003년 대구 지하철 방화 참사, 미투 사태가 벌어진 직후마다 주인공의 유머가 위축됐다가 예상치 못한 형태로 부활하며 웃음을 자극한다. 하우스 매니저 등을 무대 위로 갑작스럽게 소환해 황당한 질문을 던지는 것도 웃음 포인트다.

공연을 직접 기획한 문병재 연출가는 “유머의 기준과 취향이 천차만별이기에 특정 사물이나 상황을 대상화함으로써 관객을 웃기려 하진 않는다. 대본을 완벽히 외우지 않고 무대에 올라 대사를 뻔뻔히 까먹거나 관객에게 돌발적으로 말을 거는 등 예상치 못한 흐름을 활용해 웃음을 유발한다”고 했다.

공연만의 ‘회차’ 속성을 활용해 웃음의 윤리성을 다듬는 노력도 있다. 정진새 연출가는 “한번 제작이 끝나면 엎고 다시 만들기가 어려운 영화나 드라마와 달리 연극은 관객 피드백을 통해 유머를 수정하거나 중단할 수 있다는 장점이 크다”며 “유머 당사자성이 있는 관객이 오는 날엔 버선발로 뛰어나가 극 중 유머에 대한 의견을 구한다. ‘신파의 세기’의 경우 중앙아시아 국적의 관객 등에게 유머가 불쾌하진 않았는지 점검했다”고 말했다.

이지윤 문화부 기자 leemai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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