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미희의동행] 우리 모두의 삶이 강건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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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참 신기루 같다.
어느 한 시점에 불쑥 나타났다가 시나브로 사라지는, 하긴 우리의 생만이 아니라 모든 살아있는 것의 숙명이지 않겠는가.
아마 지나간 생의 어느 한 시점 속을 헤매고 있는 듯했다.
그이의 아슬아슬한 생이, 뒤엉켜버린 시간 속에서 현재의 자신을 잃어버린 그이의 삶이, 더 어긋나지지 않도록 지켜줬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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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일요일이었다. 한파가 들이닥친다는 예보대로 그날은 몹시 추웠다. 살갗에 닿는 냉기와 바람이 면도날처럼 사박스러웠다. 약속이 있었던 나는 잔뜩 어깨를 움츠린 채 종종걸음으로 아파트 입구를 향했다. 잿빛 하늘에 군데군데 잔설이 얼어붙어 있는 아파트 풍경은 을씨년스러웠다. 그 을씨년스러운 풍경 속에 한 할머니가 있었다. 감은 지 오래된 듯 하얗게 센 단발의 머리는 두피에 들러붙어 있었고, 옷차림 또한 추위를 막기에는 턱없이 허술해 보였다. 게다가 슬리퍼를 신고 있는 발은 맨발이었고, 손에는 올이 풀린 마대자루 하나가 들려 있었다. 마대자루를 쥔 손등이 추위로 푸르딩딩했다. 한눈에도 치매를 앓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어디 가세요. 걱정돼 묻는 내 말에 그이는 대답했다. 장 보러 가요. 장 보러 간다는 말 뒤에 그이는 뭐라 더 덧붙였지만 나는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었다. 차마 그이를 두고 갈 수 없었다. 약속시간이 늦었지만 나는 그이의 손을 잡고 아파트관리사무소로 갔다. 하필 그날이 휴일이라 아파트관리사무소는 굳게 닫혀 있었다. 다행히 전화는 받았다. 아파트 전체 방송으로 할머니의 가족을 찾아달라는 부탁과 함께 상가 안 편의점에 모셔놓겠다고 이야기하고 전화를 끊었다. 함께 들어간 따듯한 상가 안에서 굳었던 입술이 풀리자 그이는 기품이 넘치는 표정으로 초대한 손님들이 오기 전에 빨리 장을 봐야 한다고 했다. 아마 지나간 생의 어느 한 시점 속을 헤매고 있는 듯했다. 입가에 피어나는 미소로 짐작해 보건대 그 시절은 그녀의 생애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던 모양이다.
왜 그때 나는 애처로운 생각이 들었을까. 뒤죽박죽 뒤엉킨 시간 속을 살아가는 그이가 애처로운 게 아니라 우리의 삶이, 우리의 생이, 애처롭게 여겨졌다. 그이는 우리의 생이 얼마나 허약하고, 얼마나 부서지기 쉬운 것인지 잘 보여주고 있었다. 영겁의 시간에 비하면 우리 삶은 찰나에 지나지 않는다. 그 짧고도 짧은 시간을 잘 살아내야 하지 않겠는가. 다시 돌아오지 않을 시간들인데, 그 시간들을 아름답게 가꿔 나가야 하지 않겠는가. 그이는 그날 가족을 찾았을까. 그때, 그이가 가족 품으로 돌아갈 때까지 함께 있어 줬어야 했다. 그이의 아슬아슬한 생이, 뒤엉켜버린 시간 속에서 현재의 자신을 잃어버린 그이의 삶이, 더 어긋나지지 않도록 지켜줬어야 했다. 부디 그이의 남은 생이 편안하기를. 더불어 우리 모두의 삶이 강건하기를.
은미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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