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수필·동화 넘나들며… 야만의 세상 속 사람의 길을 묻다

김용출 2024. 1. 23. 2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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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 소설가 한승원 신간 ‘사람의 길’
다양한 형식 융합된 새 유형 장편소설
여러 명 분신 내세워 자신과 인생 대화
나를 희화화하니 진실해져 즐겁게 집필
‘사람의 길을 벗어나면 벌레·짐승 된다’
현대인들 소인 근성 탓 권력에 얽매여
올바르게 사는 길 찾아가도록 돕고 싶어
딸 한강 자주 연락하며 좋은 책 알려줘
하루라도 안 읽고 안 쓰면 우주 멈춘 듯
살아있는 한 계속 쓰며 길 만들어 갈 것

소설에도 에세이적인 소설이 있고, 에세이에도 소설적인 에세이가 있지 않은가. 시에 산문성이나 서사가 가미되면 재미있는 시가 될 수 있고. 형식에 구애를 받지 않고 그동안 썼던 성인 동화나 에세이, 시 형식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소설을 쓰고 싶었다. 형식에서 자유로운, 이때까지 쓰지 못한 소설을.

“오래전에 소설 ‘추사’를 썼는데, 추사는 젊을 때는 해서체와 예서체, 초서체, 전서체 등 글씨체를 구별해 글을 썼습니다. 하지만 일흔을 넘어서면서 초서와 해서, 전서, 예서를 모두 한데 어우르는 글씨를 썼어요. 봉원사의 판각 글씨처럼 특정 글씨체를 초월해 융합시켜 종합적인 글씨를 썼지요.”
원로 소설가 한승원이 시와 에세이, 동화, 소설 등 다채로운 형식을 융합한 ‘장편소설’을 들고 돌아왔다. 그는 “이야기는 사람들의 운명을 바꾸어 줄 수 있는 힘이 있다”고 말한다. 한승원 작가 제공
60년 가까이 글을 써 온 그는, 팬데믹(감염병 대유행) 시기 중에 ‘이삭줍기 사업’이라는 이름 아래 오랫동안 고민해 온 새 형식의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어찌 보면, 그것은 자서전 성격의 ‘산돌 키우기’(2021, 문학동네)의 연장선상이었다.

“시력이 약해졌으므로 한 삼십 분 활자를 훑으면 눈물이 고여 눈앞이 금방 안개 낀 듯 아물아물해지곤 함에도,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거나, 망상일지도 모르는 시상을 모아 시도 아니고 에세이도 아니고 소설도 아닌데 시이기도 하고 에세이이기도 하고 소설이고 한, 자기만의 특이한 글쓰기를 하지 않으면 우주 운행이 멈추어 버린 듯 갑갑하고 답답해진다.”

원로 소설가 한승원(85)이 시와 에세이, 동화, 소설 등 다채로운 형식을 융합한 장편소설 ‘사람의 길’(문학동네·사진)을 들고 돌아왔다. ‘장편소설’이라는 이름이 붙었지만, 시에서 수필로, 수필에서 소설로, 소설에서 시로 자유롭게 넘나드는 여러 형식이 융합된 작품이다.

한 작가는 여러 형식이 융합된 이번 작품에서 다양한 분신을 내세워 자신과의 대화를 시도한다. 작가와 분신이 서로 논쟁을 하며 문학과 삶, 세상을 사는 지혜 등을 둘러싼 다채로운 사유를 펼쳐낸다. 우리가 왜 사람의 길을 걸어야 하며, 과연 어떻게 하면 사람의 길을 걸어갈 수 있는지를.
특히 야만의 세상을 통렬하게 질타하는 노인을 통해서 자신의 마음속에 품고 있는 ‘쥐새끼’를 척결하는 일이야말로 사람의 길이라고 역설한다. 사람의 길을 벗어나면 벌레가, 짐승이 된다고. 이 과정에서 만행에 나선 초의 선사가 쌍봉사에서 늙은 스님과 선문답을 하는 장면을 통해 쥐새끼론의 원형도 보여 준다.

그러니까 늙은 스님이 절을 마치고 정좌한 초의에게 가느다란 목소리로 무얼 하러 왔느냐고 묻자, 초의는 속에서 솟구치는 말을 내뱉는다. “여기 늙은 쥐새끼 한 마리가 사람 껍질을 쓰고 앉아 있다고 해서 본디 자리로 돌려보내려고 왔습니다.” 늙은 스님은 “너처럼 그렇게 한눈에 내 속에 기생하는 그 쥐새끼를 꿰뚫어 봐 버린 놈은 처음 본다”며 가까이 오라고 한 뒤, 갑자기 초의의 코를 잡아 비튼다. 초의는 아픔을 참을 수 없어서 늙은 스님의 손을 두 손으로 잡아 젖히려고 버둥거리다가 일순간 깨닫게 된다는 일화다.

작가는 구제와 구원을 제시하는 예술의 책무를 등에 짊어지고 소설을 통해서, 이야기를 통해서 진정한 사람의 길을 향해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 준다. 결핍을 채우기 위한 옹졸하고 편협한 사익의 추구가 아닌,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과 함께하는 화엄의 길을, 인간 구원의 길을.

원로 소설가 한승원은 왜 다양한 형식이 융합된 소설을 써야 했고, 그것이 보여 주는 이야기의 진경은 어떤 모습일까. 그의 작가적 여로는 어디로 향해서 나아가고 있는 것일까. 한 작가를 지난 15일 전화로 만났다.
―이번 작품을 쓰는 과정에서 어려움은 없었는지.

“즐겁게 썼다. 찰리 채플린은 ‘실패는 중요하지 않고, 자기를 웃음거리로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는데, 자신을 희화화해서 살면 삶이 더욱 진실해진다. 말하자면, 저의 삶 속에서 진정성과 모든 것들을 희화화해 보게 되니까 오히려 보다 진실이 순수해지더라.”

―소설에는 여러 분신이 등장해 다양한 이야기로 나아간다.

“대표적인 틈입자가 율산인데, 율산은 우주 상담사라고 자칭하며 삶을 단순화하고 차원을 높여서 시인이나 신선처럼 살고 동화적인 신화적인 삶을 산다. 가령 갈매기들이 제 삶을 뚫어보는데, 갈매기의 시점이 바로 저의 시점이다. 외계인의 시각이나 외계인의 언어로 우리 삶을, 세상을 바라보고 싶었다. 우리 나이가 되면, 이승의 삶과 저승의 삶을 함께 산다.”

―결국 사람의 길은 무슨 길인가.

“조선조 선비들이 집을 나서자 길을 잃어버렸다는 기록이 있다. 사람이 길을 잃어버리면 벌레가 된다. 요즘 사람들은 소인 근성 때문에 더 많이 가지려고 하면서 권력 또는 이익 카르텔에 얽매여 사는 것 같다. 바람직한 삶을 산 사람들도 거의 없고, 원로 역시 없는 세상이다. 우리 민요에 아리랑 고개라는 표현이 있다. 아리랑 고개 이쪽은 폭압과 배반과 거짓과 폭력으로 가득 차 있는 박해받는 세상이라면, 고개 너머에는 그것으로부터 벗어나서 평화와 안식이 있다. 아들이 반강제로 집 안에다 가두듯이 하고 있는 노인이 사실은 내 분신으로, 그런 속에서 나온 게 사람의 길이다. 야만의 세상 속에서 사람의 길을 사는 것, 올바르게 사는 길을 찾아가도록 하는 것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소인 근성을 버리는 길이다.”

―‘작가의 말’에선 “이 소설이 내 최후의 길”이라고 했는데, 조금 설명해 준다면.

“제가 문학 강연을 할 때마다 마지막에는 ‘나는 살아 있는 한 시와 소설을 쓰고, 시와 소설을 쓰는 한 살아 있을 것’이라고 이야기하곤 했다. 한번은 한 노인이 만약에 한쪽 바퀴라도 무너지면 자신의 삶을 스스로 끝낼 수도 있다는 것이냐고 묻더라. 선문답하듯 대답했다. ‘꿈에 지하에서 지상으로 지상에서 천국으로 이어진 계단을 실수 없이 계속 밟고 올라가면 밤새도록 깨어나지 못하고 꿈속 계단에서 헤매지만, 거기서 발을 헛디뎌 추락하는 자는 깜짝 놀라서 깨어난 다음 다시 깊은 잠을 잘 수 있다’고. 이 이야기가 대답을 해 줄 것이다.”

1939년 장흥에서 태어난 한승원은 1968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목선’이 당선되면서 등단했다. 이후 소설집 ‘안개바다’, ‘폐촌’, ‘포구의 달’ 등과 장편소설 ‘해일’, ‘해산 가는 길’, ‘아제아제 바라아제’, ‘동학제’, ‘원효’, ‘추사’, ‘다산’ 등 많은 작품을 발표했다. 한국소설문학상을 시작으로 이상문학상, 현대문학상, 현대불교문학상, 동인문학상 등 수많은 상을 받았다. 특히 1997년 귀향한 뒤 해산토굴에 스스로를 가두고 형벌처럼 글을 쓰고 또 쓰고 있다. 커다란 바위를 들고 올라가기를 반복하는 그리스신화의 시시포스처럼.

―한강 작가와는 자주 연락하는지.

“자주 연락하고 만난다. (주로 무슨 얘기를 하시는지) 그 아이가 앞장서서 가기 때문에 저에게 많은 정보를 준다. 이번 작품에도 자연 친화적인 내용이 많이 담겨 있는데, 인디언 후손 출신의 생물학자 로빈 월 키머러의 책 ‘이끼와 함께’와 ‘향모를 땋으며’ 등 자연 친화적인 삶을 공부할 수 있는 책을 많이 보내 줬다.”

파장에 주섬주섬 보따리를 싸고 있던 한 노인이, 길을 묻는 여행자에게 자신의 인생의 길에서 이삭줍기하듯 주워 담은 이야기 한 자락을 풀어 놓는다. 긍께 말이여, …. 이야기에서 소설로, 노래에서 시로, 손짓에서 동화로 다양한 모습으로 바뀌지만, 이야기는 모두 화엄 같은 삶의 장엄이다. 노인의 이삭이 여행자의 허기진 영혼을 구제해 줄지도, 운명을 격동할지도 모른다. 지평선 아래로 막 상체를 숙이려는 저녁노을을 배경으로 이야기하는 노인의 운명까지도.

“깨어 있는 개가 어둠의 어른거리는 한 형상이나 울리는 지축을 향해 짖듯이, 귀를 가진 모든 것은 소리 나는 쪽으로 돌아보고 짖습니다. 소리 나는 쪽에 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길이 이야기가 되고 그 속에 또 하나의 새 길이 열립니다. … 소리 나는 쪽으로 돌아보듯 나는 가장 쉽고 편리한 곳을 향해 길을 만들어 갑니다. 이 소설이 내 최후의 길입니다.”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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