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피천 환경감시 예산 ‘0원’…“보호구역 지정만 하고 방치”
여의도 35배 면적에 환경청 출장소 직원 4명에 불과
주민들 “울진 산불 잊었나”…환경단체는 “관리 포기”
“욕 먹어도 생태보전지역을 지킨다는 자부심으로 감시원을 했죠. 근데 이제는 뭐하러 그러겠어요.”
국내 최대 규모의 생태·경관보전지역인 경북 울진군 왕피천 유역 환경감시초소에서 남중학 근남면 구산리 이장(59)이 지난 19일 계곡 아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남 이장은 수년간 환경감시원으로 왕피천 일대를 순찰해왔다.
그는 2014년 이장이 된 이후 환경감시원직을 떠났지만, 생태·경관보전지역인 이곳에서 주민들과 함께 음식을 요리하거나 쓰레기를 버리는 등산객·낚시꾼 등의 행위를 제지하는 데 일조해왔다.
남 이장은 “감시원이 아닌 일반 주민들도 왕피천에서의 오염행위 등을 감시하는 등 ‘지킴이’ 역할을 기꺼이 감내해왔다”면서 “공무원만으로 이 넓은 곳을 관리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오염은 시간문제”라고 지적했다.
정부가 지리산·섬진강·동강 유역 등 생태·경관보전지역 9곳의 환경감시원 예산을 전액 삭감했다. 일자리사업 평가에서 낮은 평가를 받았다는 이유에서다. 환경단체는 보호구역으로 지정만 하고 실제론 방치되는 일명 ‘페이퍼 파크(Paper Park)’로 전락할 위기라며 반발했다.
23일 환경부에 따르면 지난해 약 27억원이었던 생태·경관보전지역 환경감시원 예산은 올해 전액 삭감됐다. 고용노동부 등이 매년 정부 부처의 일자리사업에 대해 평가하는데 여기에서 환경감시원 일자리가 낮은 평가를 받았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다.
공공일자리사업의 경우 근무 기간이 길고 재취업지원서비스 등을 통해 민간일자리로 이동할 때 높은 평가를 받는다. 환경감시원은 5개월 등 단기로 근무하고 산간지역 마을 주민을 채용하기 때문에 민간일자리로 옮겨가는 경우가 없어 ‘양질의 일자리가 아니다’라는 평가를 받았다는 것이 환경부의 설명이다.
환경감시원은 생태·경관보전지역 내 야생동식물 포획 및 채취나 불법 어로 행위 등 자연환경 훼손 행위를 감시하고 환경오염행위를 신고 및 계도하는 역할을 한다.
여의도 면적(2.9㎢)의 약 35배인 102.84㎢에 달하는 왕피천 유역도 마찬가지다. 지난해 왕피천 관리요원과 감시원 고용 예산은 11억7000여만원이었으나 올해 전액 삭감됐다. 2008년부터 지난해까지 90명 안팎을 유지하던 주민 환경감시인력도 ‘0명’이 됐다.
왕피천에는 수달·산양·삵·담비 등 멸종위기야생동물 등 19종이 서식하고 있고, 1급수에만 서식하는 버들치와 연어의 회귀 지역으로 보고된 곳이다. 이 때문에 생태 탐방과 야영을 하기 위해 찾는 외지인 유입도 적지 않다.
주민 추충호씨(70)는 “배낭 뒤에 낚싯대와 조리도구를 넣고 왕피천으로 들어가는 외지인을 적발한 적이 셀 수도 없다”며 “울진 산불을 겪은 지 얼마나 됐나. 불이 나 절경 같은 이 모습이 잿더미가 될까 걱정된다”고 말했다.
대구지방환경청에 따르면 지난해 환경감시원이 왕피천에서 적발한 쓰레기 투기·불법 취사 등은 90여건에 달했다. 이로 인해 환경감시원이 사라지면 산불과 같은 재난 상황에 대한 관리·감독이 사실상 불가능해진다는 지적이 나온다. 왕피천 유역을 관리하는 대구지방환경청 출장소 직원은 4명에 불과하다.
녹색연합은 “사실상 보호구역을 포기하겠다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며 “왕피천 생태·경관보전지역이 보호구역으로 지정만 되고 실제론 방치될 위기에 처했다”고 말했다.
환경부는 환경감시원 제도의 필요성을 공감하고 있고 내년에는 예산을 확보하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환경부 관계자는 “(환경감시원 제도는)일반적인 공공일자리사업으로 평가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며 “보호지역을 보존·관리하는 데 주민참여가 중요한 만큼 내년에 다시 사업을 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김현수 기자 kh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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