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돈 벽돌’ 쌓기

김홍수 논설위원 2024. 1. 23. 2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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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독일의 초인플레이션 하면 떠오르는 사진이 있다. 아이들이 길거리에서 마르크화 돈다발로 벽돌쌓기 놀이를 하는 장면이다. 어른들은 빵을 사러 가면서 돈다발을 수레에 실어 나르고, 장작 대신 돈다발을 땔감으로 썼다. 요즘도 아르헨티나, 베네수엘라에서 비슷한 장면을 목격할 수 있다. 인플레와 잦은 화폐개혁 탓에 휴지가 된 현금 뭉치를 벽돌처럼 쌓아 놓고 기념품으로 팔고 있다.

일러스트=이철원

▶정상 국가에선 중앙은행 금고에서나 현금 더미를 볼 수 있지만 예외도 있다. 사법기관이 범죄자에게서 은닉 현금을 압수한 경우다. 2018년 중국에선 은행감독위원회 출신 부패 관리의 집에서 현금 뭉치 3t을 압수했다. 2억7000만위안, 원화로는 502억원에 이른다. 부패 혐의로 구속된 국가발전위원회 탄광부 부주임 집에서도 현금 2억3000만위안(약 428억원)이 쏟아져 나왔다. 현금 계수기가 16대나 동원됐는데, 4대는 과열로 고장이 났다.

▶우리나라에선 2011년 ‘김제 마늘 밭 사건’이 유명하다. 불법 도박 사업자가 5만원권 22만장(110억원)을 마늘 밭에 숨겼다가 발각됐다. 범죄자 누나가 부탁을 받고 현금 다발을 아파트 집의 김치냉장고, 다용도실 등에 보관하다 더 이상 감당이 안 돼 마늘 밭을 사서 파묻은 것이었다. 범죄 관련 현금 뭉치는 주로 불법 도박 범죄에서 나온다. 2019년엔 인천경찰청이 불법 도박 사업자에게 현금 153억원을 압수한 바 있다.

▶현금은 부피가 크고 악취도 심해 은닉자에겐 골칫덩이다. 사업으로 큰돈을 번 사람에게 “현금 다발을 침대 밑에 보관했는데, 악취 탓에 잠을 잘 수 없었다”는 말도 들었다. 지난해 은행 돈 3000억원을 횡령했다 적발된 경남은행 직원은 1㎏짜리 금괴 101개와 현금 45억원을 숨겨두고 있었는데, 현금 은닉 장소가 김치통이었다.

▶엊그제 부산에서 불법 도박 사이트를 운영한 일당이 붙잡혔는데, 현금 550억원을 벽돌처럼 쌓아 둔 사진이 나왔다. 돈 벽돌 무게가 총 1t이 넘는다. 수입이 절정에 달했을 때 기념으로 찍어둔 것이라고 한다. 스마트폰을 이용한 도박이 중고생에게까지 번지면서 인터넷 해외 도박 사업이 번창하고 있다. 불법 도박 시장 규모가 170조원에 이른다는 추정도 있다. 전문가들은 “김제 마늘 밭이 지금도 전국 도처에 있을 것”이라고 한다. 콜롬비아 마약 조직 두목 에스코바르가 죽은 뒤, 그가 은닉한 현금 수십억 달러를 찾는 사냥꾼들이 지금도 활동 중이라고 한다. 이들이 다음 사냥터로 한국을 지목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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