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와 옆을 자주 돌아보며, 사각지대 존재들과 연결 회복하겠다”[논설위원의 단도직입]

최민영 기자 2024. 1. 23. 20:24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화랑 밖의 공공예술’ 천근성 작가
공공예술가 천근성 작가가 지난 17일 서울 성동구 서울새활용플라자 사무실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하고 있다. 노숙인의 집을 수리하는 ‘이웃집 홈리스’ 작업에 대해 그는 “일방적으로 지원받는 노숙인들이 예술노동으로 가치를 만들어내는 경험을 하고, 어려운 일을 해냈다는 기쁨을 느끼고 나와 이웃으로서 관계를 맺는 게 목표였다”고 말했다.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공공예술가이자 적정예술그룹 ‘피스오브피스’ 대표. 경기 양평에서 태어나 동국대학교 예술대학에서 2012년 조소 전공으로 학사학위를 취득했다. ‘예술이 사회문제 해결에 별난 힌트가 될 수 있다’는 신념하에 설치·영상·퍼포먼스·교육 등 다양한 형식의 작업을 진행 중이다. 사각지대의 공간, 사물, 사람들을 예술 안에 다시 배치하고 조명하면서 환대하고자 한다. 주요 작업으로 ‘안녕 배달’ ‘서울아까워센터’ ‘이웃집 홈리스’ 등이 있다.
고립된 노인에 그리운 사람과 풍경 전달하고,버려진 물건 되살려 환경과 인간 다시 잇기
생태민주주의 주장한 고 신승철과 우애 쌓으며 공동체 만드는 방법 배우고 행동 나서
노숙인들의 집 고쳐주며 그들이 시혜 대상 아닌 호혜관계의 이웃인 것을 깨달아
화랑 안 전시도 좋은 예술이지만, 화랑 밖 사람들 변화 만나는 것도 큰 기쁨

새해 첫날 아침, 서울역에서 대만 출신 노숙인 왕모씨(60)가 세상을 떠났다. 만리타향 그의 마지막 거처는 버려진 목재를 모아 만든 간이주택이었다. 한겨울 칼바람에 왕씨가 숙소로 쓰던 텐트가 찢어지고 무너져 천근성 작가가 이웃 노숙인들과 함께 만들었다고 했다. 뉴스를 보고 궁금했다. 예술품이 투자수단으로 각광받고 미술시장의 상업화가 당연시되는 요즘, 젊은 예술가는 왜 화이트큐브(전시공간)를 벗어난 예술을 지향하며 사람들을 찾아나선 것일까. 그의 작업은 ‘배려, 연결과 환대의 회복’으로 요약할 수 있다. 고립된 노인들에게 그리운 사람과 풍경을 배달하고, 소외된 존재들을 조명하며, 버려진 물건들을 고치고 되살려 환경과 인간을 다시 잇는다. 지난 17일 서울 성동구 새활용플라자 작업실에서 만난 천 작가는 “뒤와 옆을 자주 돌아보며 함께 가는 예술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대만 출신 노숙인 왕모씨(오른쪽)가 텐트를 고쳐준 천근성 작가의 얼굴을 보며 초상화를 그리고 있다. ‘이웃집 홈리스’ 작업은 노동에 대한 보상으로 이 같은 예술노동 참여를 독려했다.

- 예술가가 꿈이었나요.

“흙 만지는 게 좋아서 미대에서 조소를 전공했습니다. 장래 희망은 막연했어요. 휴학 때 전시기획사에서 일해보니 ‘역시 미술판의 최고는 작가구나’ 싶어서 작가들이 많이 모이던 서울 문래동에 합류했습니다. 조형물 공장 같은 곳에서 일하면서 손재주에 자신감이 붙었죠. 2012년 출전한 ‘토이정크 아트페스티벌’에서 1등을 했습니다. 산처럼 쌓인 수십t 규모의 장난감 쓰레기를 활용해서 1박2일 동안 작품을 만드는 대회였는데, 업사이클링이 뜨던 때라 ‘반짝 스타’가 됐어요. 재활용품을 이용한 작품 판매와 기업들의 의뢰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 상업미술에서 돌아선 계기는 무엇입니까.

“하루는 작업을 의뢰한 기업에서 ‘재활용 공병을 모으기가 어려우니 공장에서 빈 공병을 새로 만들어 보내주겠다’더군요.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것 같았어요. 재활용품으로 멸종위기 동물을 압도적인 크기로 만들곤 했지만, 이런 작품들이 알맹이 없이 겉만 번지르르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제 속에서 나온 게 아니었어요. 의뢰는 거절했고 이후 첫 개인전도 크게 주목받지 못하며 한동안 방황했습니다. 그러다 2015년 입주한 대구예술발전소에서의 창작 경연에서 미국의 미술평론가 아서 단토의 <예술의 종말 이후>를 읽고 발표한 과제 ‘여름날’을 만들면서 다른 가능성을 깨달았어요.”

- 어떤 작업이었습니까.

“제 작업실에는 에어컨 바람이 빵빵한데 바로 옆의 청소노동자 쉼터는 에어컨은커녕 창문조차 없어 문을 열고 식사하시는 모습을 볼 때면 마음 한구석이 찔리는 느낌이었어요. 이 문제를 어떻게 가시화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 작업실 에어컨에 송풍관과 모터를 설치해서 쉼터로 시원한 바람을 보내드렸습니다. 서로 문을 열고 연결한 송풍관 위에 감사의 마음을 담은 귤이나 간식이 놓이고, 짧은 인사가 조금 더 긴 대화로 이어졌어요. 이전의 작품은 하나로 완결되는 형태였는데, 이 작업 이후는 전시나 발표를 하지 않더라도 제 기억 속에 체화돼서 남는 작업과정이 굉장히 중요해졌습니다.”

단토는 <예술의 종말 이후>에서 “예술이 취해야 할 특정한 역사적 방향 같은 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다. 포스트모던 이전의 예술이 현실을 모방해 결과물을 만들었다면, 이후에는 예술이 현실의 일부 또는 그 자체가 되며 지평이 넓어졌다. 핵심은 “예술의 참된 철학적 본성”을 깨닫는 것이다. 특히 1960년대 말 이후 본격적으로 등장한 공공미술은 모더니즘 미학에 바탕한 현대미술을 넘어 ‘정신적 재생의 시작’을 꿈꾼다. ‘지금 여기의 문제’를 드러내고, 사회적 비판을 형성하며 대화의 장을 만드는 새로운 흐름을 이루고 있다. 눈에 보이는 유미적인 작품보다 예술이라는 의도된 행위 그 자체가 중요해졌다.

‘반복노동 대행서비스’ 개인전은 로봇으로 자동화되는 인간 노동의 소외에 대해 다뤘다. 천근성 제공

- 2016년 ‘반복노동 대행서비스’ 개인전시 역시 노동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계기가 있었나요.

“고속도로에서 사람을 대체한 로봇 신호수를 보면서 생각이 복잡했습니다. 저는 고속도로 톨게이트 요금을 징수원에게 냅니다. 완전 하이패스 체제가 된다면 이분들은 어디로 갈지 걱정됐거든요. 징수원에게 ‘오늘 날씨가 춥네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하고 인사말을 건넵니다. 잠깐의 대화지만 서로에게 힘낼 기운이 될 수 있어요. 그런데 오싹한 게, 엄연한 사람이 일하는 와중에도 배경에 ‘하이패스 사용하면 더 좋아요’라고 자동음성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로봇이 가성비가 높다고 판단하니 시급 낮고 반복노동을 하는 사람들부터 대체하려는 거죠. 변화를 막을 순 없지만 늦추거나 혹은 좋은 방향으로 갈 수 있지 않을까, 예술가로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했습니다. 그래서 산업박람회 형식을 빌려 ‘반복노동 마네킹’을 판매하는 ‘근성 ENG(엔지니어링)’ 기업을 전시 콘셉트로 잡고 톨게이트 징수원, 마트 판매원 로봇들을 등장시켜 노동이 소외되는 현실을 짚어봤습니다. ‘시급이 1000원대에 노조 가입 안 하고, 24시간 근무에 식대도 안 든다’ 이런 내용의 광고 영상과 웹사이트도 만들었는데, 진짜 판매 상품으로 착각한 이들이 구입 문의를 해올 땐 좀 당황스러웠어요.”

- 그 무렵에 대구 요양병원에 계신 어르신들에게 ‘영상 배달’을 하는 작업도 하셨습니다.

“생활비가 빠듯해서 예술인파견지원사업을 통해 요양병원에서 잠시 일할 때였어요. 어르신들과 그림 그리며 말동무하다가 이분들이 그리운 고향집과 호형호제하던 친구들을 만나지 못한 채 길게는 10년간 병원에 고립돼 계시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그래서 주소도 없이 ‘마을 입구에 탱자나무가 있다’ 이 정도 단서를 갖고 대구와 주변 지역을 수소문해서 영상을 찍어 전달하는 ‘영상 배달부’가 됐습니다. 2016년 ‘로컬 익스프레스’팀을 꾸려 의정부 요양병원에서 무연고 어르신들께 영상을 전달할 때는 제주, 순창, 합천, 영덕 등 전국을 돌아다녔어요. 사회복지사가 어르신 거주지 주변 요양원에 자리가 없으면 다른 지역으로 보내는데 멀리 경기도까지 오는 경우가 적지 않더라고요.”

- ‘찾아가는 맞춤형 예술’인 셈이네요.

“그간 전시회를 열면 찾아오는 사람, 그것도 예술과 관련된 사람들만 주로 온다는 점이 고민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미술 전시장에 가장 닿지 않는 사람이 누굴까 살펴보게 됐죠. 요양병원 병상에서 하루 종일 무료하게 TV만 봐야 하는 어르신들의 어제와 같은 오늘, 그리고 오늘 같은 내일이 이어지는 사이에 예술을 불어넣어 환기해드리고 싶었어요. 어르신들 옛이야기를 듣고 재현하는 짧은 공연을 병실에서 안무가와 함께 했고, 침상에 누워 서로 줄을 당기는 운동회도 열었는데 다들 즐거워하셨어요. 그렇게 누군가를 위하려고 한 작업인데, 사실 가장 크게 변한 건 저였습니다. 사각지대에 놓인 존재들을 외면하지 말자는 결심이 전보다 굳어지게 됐어요.”

천 작가는 자신의 스승으로 지난해 7월 심근경색으로 세상을 떠난 신승철 생태적지혜연구소 소장을 꼽았다. 생명권, 공동체운동, 탈성장과 생태민주주의를 연구해온 철학자이자 30년 넘게 소수자들과 연대해온 사회운동가였다. 그의 공부모임에서 “우애와 환대를 쌓으며 공동체를 만드는 방법”을 배웠고 바로 행동에 나섰다.

- 2019년 서울 문래동에서 ‘피스오브피스’, 직역하면 ‘평화의 조각’이라는 예술 공동체를 만드셨어요. “우리 모두는 조각이며 이어붙일 때 의미가 있다”는 뜻이라죠.

“운 좋게 큰 작업실을 빌렸는데 사람들이 오가는 공간으로 만들고 싶어서 물물교환을 할 수 있는 선반인 ‘자투리 잡화점’을 작업실에 만들었습니다. 작가들이 작업을 마치면 목재 조각, 원단, 페인트, 철근 등의 자투리 재료가 생기는데, 남는 재료는 놓고 가고 필요하면 가져가는 식이었죠. 금액을 정했다면 돈이 오가는 거래관계로 끝나겠지만, 사람들은 자기가 이익을 얻은 물물교환의 경우 부채감이 남아서 더 많이 베풀려고 합니다. 그렇게 오가며 만나고 어울리고 아이디어를 나누고 배우는 과정에서 공동체가 형성되는 거죠. 함께 팀을 꾸려 프로젝트도 하고요. ‘사람만 모이면 뭐든 할 수 있다’는 확신을 그때 얻었습니다. 온라인보다 대면관계를 통해 서로 배우는 게 더 많고 빠릅니다.”

‘서울아까워센터’ 작업은 버려진 사물들을 되살리는 퍼포먼스를 통해 자본주의와 환경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를 마련한다.

- 한 인터뷰에서 “버려진 것은 돌봄에 의해서 순환의 사이클을 갖게 된다”면서 ‘자투리’는 “존재 이유를 아직 발견하지 못한 상태”일 뿐이라고 하셨죠. 이 같은 발상이 2020년부터 ‘서울아까워센터’ 활동으로도 이어진 것이겠네요.

“형광색 작업복을 입은 팀이 길에 버려진 가구 등을 수리하면, 구경하려고 발걸음을 멈춘 행인들에게 노래와 율동으로 취지를 전달하는 거리 퍼포먼스를 했어요. 처음엔 게릴라처럼 ‘사물돌봄’을 한 뒤에 그냥 도망쳤는데, 나중엔 당근마켓에 위치를 알려서 필요한 이가 무료로 가져갈 수 있도록 했습니다. 사실 고칠 게 많지 않은 물건이 대다수예요. 그냥 닦기만 해도 번듯하게 쓸만해지죠. 그걸 보는 관중의 마음에 ‘아깝다’는 연민의 마음을 넘어서 ‘아깝다, 그럼 나도 환경보호와 기후변화에 대해 뭔가를 해야겠다’는 ‘정동(情動)’을 일으키는 게 목적이었어요.”

- 환경문제에 접근하는 예술가의 방식은 시민단체 활동과 어떻게 다른 걸까요.

“시민단체가 제도 개선으로 변화를 꾀한다면, 예술가로서 저는 일단 제 자신이 바뀌는 게 좋습니다. 의도된 행동을 해서 사건이 생기고, 당연하게 여겨졌던 개념이 부서지면서 사고가 바뀌는 경험을 하게 돼요. 타인에게는 ‘내가 이렇게 달라져보니 좋은데 한 번 이렇게 해보지 않으실래요’라고 제안하는 거죠.”

- 노숙인 집수리 작업은 어떻게 시작하셨나요.

“2016년 결혼하고 서울역 근처로 이사하면서 노숙인들을 자주 마주쳤는데, 모르는 척하는 게 제 나름의 배려였어요. 그러던 어느 겨울 새벽, 첫차를 기다리는데 한 노숙인이 제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인사를 건네더군요. 처음엔 저에게 하는 말인 줄도 모르고 주변을 두리번거렸죠. 이 순간이 계속 마음에 남더라고요. 2022년 태어난 아들을 유아차에 태워서 서울역 앞을 느리게 산책하고 동자동 쪽방촌의 공원에서 쉬다가 이웃으로서 이들과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지 구체적인 고민이 깊어졌습니다. 그렇게 지난해 공공예술 프로젝트 ‘욕망이 빠져나간 자리: 출몰지’에 ‘이웃집 홈리스’로 참여했습니다.”

매주 수요일 그는 ‘집수리’라고 쓰인 수레에 장비를 싣고 서울역 광장으로 갔다. 말을 먼저 걸어오는 이와 동행해 집을 함께 고쳤다. 대가로는 천 작가 본인의 초상화를 그려달라고 했다. 5분이라도 얼굴을 관찰하고 이름을 적으면 잊지 않게 된다. 천 작가는 “일방적으로 지원받는 노숙인들이 예술노동으로 가치를 만들어내는 경험을 하고, 어려운 일을 해냈다는 기쁨을 느끼고 나와 이웃으로서 관계를 맺는 게 목표였다”고 말했다. 누군가는 그림 대신 기타 연주를 들려주기도 했고, 누구는 굳이 밥값을 손에 쥐여줬다.

- 대만 출신 노숙인의 별세는 안타깝습니다.

“20년쯤 텐트촌에서 노숙생활을 하신 분인데, 전에 보수했던 텐트가 추운 11월에 아예 망가졌어요. 그래서 홈리스야학에서 저의 사물돌봄 강의를 듣는 분들과 함께 폐가구 목재를 모아서 집을 만들었습니다. 한 달을 채 못 지내고 돌아가셨네요. 이후 텐트촌을 찾아갔더니 어느 분이 ‘왕씨가 집 만들어준 사람에게 남긴 선물’이라며 꾸러미를 내미셨어요. 그 안엔 방한용 귀마개와 장갑, 무릎담요가 들어 있었습니다. ‘나쁜 냄새가 배거나 더러워지지 않게 비닐로 꽁꽁 싸서 맡긴 것’이라고 하더군요. 받는 순간 울컥했어요. 노숙인들이 일방적 시혜 대상이 아니라 호혜관계를 맺는 이웃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지요. 사실 홈리스들은 굉장히 선하고 착한 분들이 많아요. 싫은 소리 못하고 당하기만 하다가 길로 밀려난 거죠.”

천 작가는 “돈이 돈을 부르는 자본 축적처럼, 관계 또한 연결되며 쌓인다”면서 “화랑 안 전시도 좋은 예술이지만, 화랑 밖 사람들의 변화를 만나는 것도 큰 기쁨”이라고 말했다. 시대를 앞서 험난한 길을 개척하면서도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았던 백남준 작가처럼 나아가되 “뒤와 옆을 자주 돌아보며 함께 가는 예술”을 하고 싶다는 이 젊은 작가의 다음 발걸음은 어디로 향할까.

최민영 논설위원

최민영 논설위원 min@kyunghyang.com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