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이 돌을 지닌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지난해 가을 개봉 소식을 접했을 때만 해도 볼 생각이 없었다. 언제 적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인가 시큰둥했고, 믿지 못할 게 노장의 은퇴 선언이라더니 싶었다. 뒤늦게 극장에 간 것은 은퇴를 번복하며 내놓은 그 복귀작 제목이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임을 알고서였다. 전작을 통틀어 저렇듯 무겁고 직설적인 작명은 못 봤으니까. 감독이 하고 싶은 말이 있구나 짐작했다. 미처 못한, 기어이 꺼내야 할 이야기가 있나 보다. 동의하든, 반발심이 일든 들어야겠다 생각했다. 그가 만들어온 작품들의 정서적 수혜자로서 그래야 할 것 같았다.
대학 시절 첫 축제 기간, 늦은 밤 영화동아리에서 프로젝터와 스크린을 학생회관 앞에 설치하여 <모노노케 히메>를 틀어주었다. 번역 자막은 허술했고 화질은 조악했지만, 그간 알아온 만화영화와 뭔가 다르다고 느꼈다. 만든 이가 미야자키 하야오이며, 그가 속한 스튜디오 지브리의 창작물은 믿고 보라고 선배가 알려주었다. 이후 한동안 동숭아트센터와 시네코아와 학교 후문 비디오방을 전전하며 그의 애니메이션들을 찾아봤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이세계(異世界)에 틈입한 소년 마히토의 모험과 성장을 다룬다. 극 후반부에 소년은 큰할아버지란 사람을 만난다. 이세계에서 천상의 돌들로 탑을 쌓아올려 현실 세계를 주조하는 조물주 같은 존재. 늙고 지친 그는 자기 소임을 마히토에게 넘겨주길 희망하지만, 소년은 이어받길 거절한다. 당신의 돌들은 이미 오염된 돌들이라 말하면서. 그런 소년을 현실 세계로 돌려보내며 큰할아버지는 ‘악의에 물들지 않은 돌’ 하나를 쥐여준다. 이걸로 너만의 탑을 쌓으라고. 풍요롭고 평화로우며 아름다운 너만의 세계를 만들어보라고.
눈물이 흘렀다. 엔딩크레디트가 올라가고 상영관에 불이 켜진 후에도 부끄러움을 잊고 울었다. 대사가 멋져서, 혹은 감동해서가 아니었다.
또래 다수가 그랬듯 20대의 난 미야자키가 만든 세계에 매료되었다. 흑백의 경계선이 흐릿해서 좋았고, 절대악을 쉽사리 상정하지 않아서 좋았다. “진짜 나쁜 건 (도둑이 아니라) 사람 마음을 후리는 위정자들이야” “파시스트가 되느니 돼지인 편이 나아” “땅에 뿌리내려 바람과 함께 살아가자. 씨앗과 겨울을 넘고 새들과 봄을 노래하자” 같은 대사나 노랫말에 담긴 정서가 좋았다. 그를 통해 생태주의와 아나키즘과 애니미즘을 알게 되었다. 그러다 언제부터였을까. 치열하게 파고들어야 할 지점에 다다를 때면 그가 본인이 축조해낸 견고한 동화적 요새로 도피해 숨거나 사적 서사에 애써 시선을 붙들어둔다는 인상을 받곤 했다. 평화주의적 세계관을 내보이고도 군국주의 미화 논쟁에 휘말린 전력은 이와 무관하지 않을 듯했다. 또한 후계자 양성에 사실상 실패했고 은퇴를 몇 차례 번복했으며, 스튜디오 지브리 제작부는 이미 해산되었다고 들었다. 자신의 돌들이 빛을 잃어감을 그는 누구보다 먼저 예민하게 감지했을 것이고, 알고도 그리 행한 자기 고집과 그악스러움이 어쩌면 미웠을 테다.
그러면서도 돌 하나를 순정하게 품고 있었던 걸까. <미래 소년 코난>을 만들던 무렵부터 지금껏. 긴 시간 동안 쌓아올린 탑이 무너져내리는 폐허를 지켜보며 함께 사라져갈 여든셋의 큰할아버지는 ‘풍요롭고 평화로우며 아름다운 너만의 세계를 만들어보라’는 바른생활 교과서에나 나올 법한 제언 안에 간절함을 꾹꾹 눌러담아 그 돌을 다음 세대에 건넸다. 힘이 약한 돌이니 이내 잊힐 거라 말하면서도 그걸 쥐여주고 싶었을 이의 마음을 헤아려본다.
<모노노케 히메>의 사슴신 시시가미가 잃었던 목을 되찾자 죽어가던 숲이 일순간 생명의 빛깔을 되찾는 장면에서 스무살의 난 심장이 물고기처럼 뛰었다. 당시 그로부터 건네받은 악의에 물들지 않은 돌조각을 주머니에서 꺼낸다. 이 돌을 지닌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이소영 제주대 사회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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