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주 30주기…“남편의 옥중시 처음 받았을 때 정말 살벌하더라”
“자유인이고 막힌 데가 없었어요. 여기저기 넘나들 수 있는 호인이었고요. 하지만 생활인의 입장에서 볼 때는 구제불능이었죠.”
1970~80년대 군사독재 시절 한국의 대표적인 민중시인이었던 고 김남주(1945~94) 시인의 부인 박광숙(74)씨에게 인간 김남주의 가장 빛나는 점이 뭐냐고 묻자 나온 말이다.
두 사람은 반유신 민주화와 반제 민족해방을 목표로 결성된 비합법 조직인 남조선민족해방전선(남민전)에서 활동하던 1978년 10월 처음 만났다. 이듬해 몰락을 앞둔 유신 정권의 간첩 조작으로 나란히 구속된 뒤 박씨는 1심에서 집행유예를 받아 먼저 풀려났고 시인은 9년3개월 옥에 갇혔다.
광주항쟁이 터지기 16일 전에 옥에서 나온 만 30살 박광숙은 몇 달 안 되는 조직 활동 기간 집이 어디냐고 물으면 늘 없다고 답하던 시인의 옥바라지를 맡기로 맘먹었다. 누군가 시인을 돌보기 어렵다는 생각에서다. 둘은 활동 기간 서로를 향해 어떤 연애 감정도 드러내지 않았고 시인의 확정 형량도 15년이나 됐다. “언젠가 아들 토일이가 왜 아빠랑 결혼했냐고 물어요. 그 말에 ‘80년 5월 광주에서 희생된 수많은 사람을 보면서 엄마도 뭐라도 하고 싶었다’고 답했죠.”
둘은 시인이 형 집행정지로 풀려난 이듬해인 1989년 결혼해 딱 5년을 부부로 살았다. 췌장암이 뒤늦게 발견된 시인이 30년 전 2월13일 병마의 고통을 끊고 저세상으로 떠난 것이다. 네 살에 아빠를 떠나보낸 토일은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현재 국회의원 보좌진으로 일하고 있다. 결혼도 했다. 남민전 사건으로 재직하던 서울 사립중에서 해직당한 박씨는 만 50살 되던 2000년에 복직해 12년 동안 교단에서 국어를 가르쳤다.
지난 19일 박씨를 인천시 강화군 불은면 자택에서 만났다.
김남주 시인 30주기 추모식은 내달 17일 오전 11시 광주 5·18민주묘지에서 열린다. 김남주기념사업회(회장 김경윤 시인)와 광주·전남 작가회의 등이 주최한다. 오는 9월엔 학술대회와 아카이브전, 추모문화제도 열린다.
“사업회에 늘 미안해요. 제 마음으로는 이제 떠난 사람은 떠나보내고 (추모 행사를) 그만해도 될 것 같은데요. 제가 이런 말을 하면 사람들이 좀 의아하게 생각해요. 부인이 왜 그런 말을 하냐고요. 김남주는 가족만의 김남주가 아니라면서요. 하지만 제 내면에는 굳이 이름에 연연해 집착하지 말자는 생각이 있어요. 불교적 세계관의 영향이죠. 하지만 제 의지대로 되지 않더군요. 흐름에 맡기고 있습니다.”
그는 24년 전 광주 중외공원에 김남주 시비를 세웠던 날을 떠올렸다. “그때 고 이문구 선생이 시비가 우람해 참 좋다며 ‘북에 광개토대왕비가 있다면 남에는 김남주 시비가 있다’고 하시더군요. 저에게는 그 말이 선생님의 진짜 마음으로 들리지 않았어요. 나중에 보니 이문구 선생은 돌아가실 때 절대 추모사업을 하지 말라고 유언하셨더군요.”
상고 다닐 때 을유나 정음출판사에서 나온 문학전집을 읽으며 문학에 대한 흥미를 키운 그는 숙명여대 국문학과에 들어가서는 당시와 불교 선시 읽는 재미에 푹 빠졌다고 한다. “대학 시절 선시나 고대시를 제대로 읽고 싶어 논어 배우는 학원도 다녔죠.” 시인의 옥중 편지에는 남편이 그에게 일본어를, 그는 남편에게 한문을 배우라고 권하는 내용이 있다. “당시에는 굉장히 심오한 자연관이나 불교관이 있어요. 한문을 배워 감옥에서 그런 시를 음미하면 삶이 좀 윤택해질 수 있다고 생각했죠.”
서슬 퍼런 유신 체제에서 반정부 지하조직에 들어가는 것은 목숨을 거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런 줄 알았으면 들어가지 않았겠죠. 사실 교사로 있을 때 회의가 많았어요. 교과서에 유신 찬양 내용이 많았고 중2 학생들에게 그걸 가르쳐야 했잖아요. 당시는 또 지식인들이 민주화 운동에 많이 뛰어든 시기였고요. 저도 교사로 돈 버는 것 말고 다른 실천 활동도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었어요. 그 시절 종로5가나 흥사단에서 저명 인사들의 강연이 많았는데요. 그 강의를 듣고 하면서 (조직) 활동에 관심을 갖게 되었죠.”
유신 때 남민전 사건으로 함께 구속
1심 석방 뒤 9년 동안 시인 옥바라지
89년 결혼하고 5년 부부로 산 뒤 사별
“30년 됐으니 추모행사 그만하고 싶은데
가족만의 김남주 아니라고 하더군요”
“남편 시 처음 봤을 때 너무 살벌…
한문 배워 당시나 선시 읽었으면 했죠”
내달 17일 5·18묘지 30주기 추모식
그는 자신이 민주화 운동에 나선 데는 집안 영향도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어릴 때 부모님은 밥상머리에서 세상의 옳고 그름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해주셨어요. 세무서 직원이었던 아버님은 1979년 초 ‘크리스찬아카데미 사건’이 나자 이 사건 재판을 다 방청하셨어요. 남민전 때는 관련자 재판에 다 들어가 딸과 관련된 증언이 나올 때마다 메모해 변호사에게 전달하셨죠.” 그가 딸의 장래를 걱정한 부모의 만류에도 끝까지 시인 옥바라지를 할 수 있었던 데는 당시 전남대 교수로 있던 오빠의 도움도 컸단다. “광주에서 김 시인 이야기를 많이 들었던 오빠가 제 편에서 부모님을 설득했죠.”
‘약혼녀 박광숙’에게 보내는 시인의 옥중 편지 추신을 보면 늘 구해달라는 책 이름이 빼곡하다. 대학 시절 미 문화원에서 훔친 영어 원서 ‘들어라 양키들아’를 읽고 반미의식을 가졌다는 시인은 지독한 책벌레였다. 시인은 그에게 스페인어책을 구해달라며 당시 한국외대에 재직하던 민용태 교수를 찾아가 보라고도 했다. “저는 직장 생활 때문에 무난히 구할 수 있는 책만 보냈어요. 영어와 독일어, 일어책은 시인의 후배인 최권행 교수가 맡아 구했죠.”
그는 1982~86년 보사부 산하 대한가족계획협회 홍보 담당자로 일하기도 했다. 이 일이 무척 즐거웠단다. “아는 분이 배려해서 신원조회 서류 제출을 미뤄 가며 다닐 수 있었어요. 그때 탤런트 최불암을 광고 모델로 해 ‘둘도 많다! 하나만 낳자’는 공익광고를 만들었고 한국방송 아침 뉴스에 ‘인구문답’이라는 꼭지를 만들어 3년 동안 여러 소재로 인구 문제를 다루었죠. 한명숙, 최열, 박성준 등 민주화 운동으로 고초를 겪은 분들에게 원고를 맡겨 도움을 주기도 했고 민중민술가들에게는 방송에 쓰일 삽화도 의뢰했죠.”
9년의 옥바라지 동안 가장 난감한 순간을 묻자 그는 “시인이 옥중에서 쓴 시를 가지고 왔다고 누군가 직장으로 연락을 해올 때”라고 답했다. “당시 (시인이 투옥 중인) 광주교도소에 근무하던 한 직원이 위험을 무릅쓰고 서울까지 와 옥중시를 저에게 전하곤 했어요. 그럴 때면 겁이 났죠. 당시는 수시로 검문검색이 있었고 동생도 학생운동을 하던 터라 많이 불안했어요. 그래서 시를 장독대에 숨기기도 하고 타이핑 뒤 원문을 찢어 버리기도 했죠.” 투옥 작가에게 집필을 허용하라는 시인의 글이 88년 8월 한겨레신문에 실린 뒤 재소자의 집필과 신문 구독이 가능해진 것도 기억에 많이 남는단다. “제가 직접 한겨레신문사를 찾아가 글을 전달했었죠.”
당시와 선시 애호가인 그에게 남편의 시는 어떻게 다가왔을까? “처음 옥중시를 받았을 때 그렇게 살벌한 시가 없었어요. 부담스러워 누구에게 전하기 어려웠어요. 저한테 시를 전해받은 창비 출판사 직원도 난감해하더군요.” 그는 김남주 시의 장점과 단점을 이렇게 말했다. “남편 시는 투쟁 현장에서 쓴 시입니다. 그래서 투쟁을 고양시키는데 도움이 됩니다. 하지만 서정적 감성이나 희로애락의 깊은 고뇌는 잘 안 느껴집니다. 아쉽죠.”
그는 남편 10주기 때 광주 사람들 앞에서 “김남주의 시는 평화 시대에 잘 어울리지 않는다. 험악한 시대에나 읽힐 시이다. 앞으로 김남주의 시가 안 읽히는 시대가 왔으면 한다”는 말을 했다가 냉랭한 분위기에 휩싸였던 기억이 있다. “제 동서가 해직교사 출신인데요. 당시 제 말을 듣고 부인이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냐고 하더군요.”
인터뷰를 마치며 가장 좋아하는 남편의 시를 묻자, ‘이 가을에 나는 푸른옷의 수인이다’로 시작하는 시 ‘이 가을에 나는’과 아들과 고향의 들길을 걸으며 쓴 시 ‘추석 무렵’을 꼽았다. “서정과 리듬, 고뇌가 있어 좋아요.”
유신 정권의 고문 조작으로 간첩으로 몰린 남민전 구속자 가족들은 석방 운동도 어려움을 겪었다. 민주화 운동 구속자의 일부 가족이 함께하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훗날 장관을 지낸 분의 어머니는 제가 가면 근처에 오지 말라고 냉대하기도 했죠. 반면 남민전 관련자 가족들은 그 시절 백안시당하던 통일혁명당 사건(1968년)이나 재일동포 간첩단 사건 장기수 가족들과 늘 함께했어요. 구명 문건을 만들어 김대중씨 집을 찾거나 할 때 언제나 같이 갔죠. 돌이켜보면 잘 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와 시인은 2006년에 민주화 운동 관련자로 인정 받았다.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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