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맞으며 尹 기다린 한동훈, '폴더 인사'로 갈등 봉합

尹, 한동훈 재신임... 韓, 尹 권위 세운 모양새
명품백 의혹, 공천 이견 등 갈등 요소 잠복
野 "잿더미 된 시장을 배경으로 삼나" 비판

윤석열 대통령이 23일 오후 충남 서천군 서천수산물특화시장 화재 현장을 찾아 피해 상황을 점검하기 앞서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을 만나 악수하고 있다. 대통령실 제공

'사퇴' 요구와 거부로 맞서던 윤석열 대통령과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23일 파국을 피했다. 한 위원장이 한껏 자세를 낮춰 대통령 권위를 인정하자 윤 대통령은 한 위원장에 대한 애정과 신뢰로 화답했다. 이로써 현재 권력과 미래 권력의 갈등은 봉합됐지만 '김건희 리스크'를 비롯한 불씨는 여전히 남았다. 다만 야당을 중심으로 대형 화재 현장에서 이뤄진 두 사람의 행보가 부적절하다는 비판도 제기됐다.

눈 맞으며 尹 기다린 한동훈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23일 화재가 발생한 충남 서천 특화시장에서 현장을 방문한 윤석열 대통령에게 허리 굽혀 인사하고 있다. 서천=뉴스1

두 사람은 충남 서천 특화시장 화재 현장에서 만났다. 한 위원장 거취를 놓고 충돌한 지 이틀 만이다. 한 위원장은 녹색 민방위복 차림으로 먼저 도착해 눈발이 날리는 맹추위 속에서 15분간 그대로 눈을 맞으며 윤 대통령을 기다렸다. 윤 대통령은 한 위원장과 악수를 한 뒤 팔을 툭 치며 친근함을 나타냈다. 이날 다른 참석자에게는 하지 않은 제스처다.

특히 한 위원장은 허리를 90도 가깝게 숙이는 '폴더 인사'로 윤 대통령을 맞았다. 윤 대통령은 상황보고를 받으며 “바람이 많이 불어 피해가 커진 것 같다”고 안타까움을 표했다. 한 위원장은 손을 모은 채 윤 대통령 한 발 뒤에 서 있었다.

현장 점검을 마친 윤 대통령은 한 위원장에게 대통령 전용열차 탑승을 권했다. 두 사람은 한 시간 넘게 옆자리에 앉아 대화를 나눴다. 한 위원장은 서울역에서 기차에서 내리며 '대통령실의 위원장 사퇴 요구에 관해서도 대화를 했느냐'는 취재진 질문에 "그런 말씀은 서로 다 전에 이렇게 언론을 통해서 보도가 된 것"이라며 "그보다는 민생 지원에 관한 얘기를 서로 잘 나눴다"고 답했다. 이어 "결국 정치는 민생 아니겠느냐"며 "그런 점에서 민생에 관한 여러 가지 지원책이라든가 이런 부분에 대해 (윤 대통령이) 건설적인 말씀을 많이 하셨고 제가 잘 들었다"고 덧붙였다.

윤석열 대통령이 23일 충남 서천군 서천읍 서천 특화시장 화재 현장을 방문해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과 함께 권혁민 충남 소방본부장으로부터 피해상황을 보고 받고 있다. 대통령실 제공

尹은 한동훈 재신임, 한은 尹 권위 세워준 모양새

이처럼 윤 대통령은 한 위원장을 재신임하고, 한 위원장은 윤 대통령을 깍듯이 예우했다. ‘갈등이 봉합된 것이냐’는 질문에는 “저는 대통령님에 대해서 깊은 존중과 신뢰의 마음을 갖고 있고 그게 변함이 전혀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대통령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 민생을 챙기고 국민과 이 나라를 잘되게 하겠다는 생각 하나로 여기까지 온 것”이라며 "그러니까 (갈등 봉합과 같은) 그런 말씀을 할 부분은 아닌 것 같다"고 강조했다.

한 위원장은 전날만 해도 대통령실의 사퇴 요구와 관련해 "제 임기는 총선 이후"라고 일축했다. “당은 당의 일을 하는 것이고 정(政)은 정의 일을 하는 것”이라며 마이웨이도 시사했다. 반면 하루 만에 '대통령에 대한 깊은 존중'으로 방점이 달라졌다.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23일 화재가 발생한 충남 서천 특화시장을 찾아 눈을 맞으며 윤석열 대통령을 기다리고 있다. 서천=뉴스1

명품백 의혹, 공천 이견 등 갈등 요소 잠복

단, 총선을 앞두고 김건희 여사 명품백 수수 의혹이나 공천을 둘러싼 이견이 다시 불거질 가능성은 여전하다. 갈등을 풀지 못하고 봉합하는 데 그쳤기 때문이다. 비영남권 중진 의원은 “파국은 곧 공멸이라는 인식을 함께한 것 아니겠느냐”며 “명품백 의혹 등에 대한 시각차가 워낙 큰 만큼 당장 갈등 원인을 해소하기보다는 일단 덮고 가는 길을 택한 것 같다"고 말했다.

대통령실은 "현장에 나온 150여 명의 피해 상인들은 대통령의 방문에 감사를 표하고 눈물로 어려움을 호소했다"고 밝혔다. 윤 대통령은 상인 대표들과 만나 "명절을 앞두고 얼마나 상심이 크시냐. 여러분들이 바로 영업하실 수 있도록 최대한 신속하게 지원해 드리겠다"고 강조했다. 다만 일부 상인들은 "윤 대통령이 피해 상인들에게 한 마디 위로나 어떤 발언도 없이 사진만 찍고 갔다"고 항의했다. 이에 대해 강선우 민주당 대변인은 이날 서면브리핑에서 "아무리 윤석열·한동훈 '브로맨스 화해쇼'가 급했다지만, 어떻게 하룻밤 사이에 잿더미가 된 시장과 삶의 터전을 잃은 상인들을 배경으로 삼을 생각을 하느냐"라고 비판했다.

이성택 기자 highnoon@hankookilbo.com
박세인 기자 sane@hankookilbo.com